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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불꽃 사나이 정대만.

by 노바_j.5 2005. 2. 2.
슬램덩크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대작이다. '너무 농구에 치중하다 만화로서의 호흡을 놓치고 결국 미완으로 끝나게 되어버렸다'라는 이유로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도 슬램덩크가 가져온 열풍이나, 90년대 만화사에 이름을 올릴만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외면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슬램덩크는 훌륭하다. 실사적이고 세밀한 그림이나 뛰어난 연출은 농구라는 소재의 매력을 십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적으로 보았을 때, 슬램덩크가 가진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비록 이성관계에 대한 비중이 적고 등장하는 캐릭터의 성(性)비율도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농구 팀 하나 등장하면 땀내나는 인물들이 10명씩 나온다. 여자는 기껏해야 손으로 꼽을 정도. 채소연과 한나를 빼면 기자인 경태의 누나와 서태웅 팬클럽 정도 밖에는...;) 남자들의 드라마라고 해서 전혀 지루하거나 투박하지 않다. 그것은 다양한 캐릭터의 군상들에서 나온다.

슬램덩크를 다시 떠올릴 때 사람들이 꼭 하는 질문이 있다.
"너는 슬램덩크에서 누가 제일 좋냐?"
농구에만 심취해있던, 어려운 게 없었던 시절의 나는 한동안 윤대협이 가장 좋았다. 천재적인 농구 센스와 재능, 유들유들하고 여유만만하면서도 절대로 둔하거나 멍청하지 않은 성품. 팀 전체를 아우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조화력.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는 '판타지 스타'.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윤대협일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에 와 닿은 캐릭터가 있다. 슬램덩크에서 독보적은 아니더라도 독특한 위치를 홀로 점하고 있는 인물. '불꽃 사나이' 정대만. 그는 작품을 통틀어 유일하게 과거에 연루되는 캐릭터다. 중학 MVP였던 그는 과거의 한 시절,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하고 만다.

정대만은 화려했던 과거의 시절을 갖고 있었지만 한 때 타락했었고, 그가 보낸 세월은 그가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농구장 위에서 직접적인 악영향으로 되돌아온다. 정대만은 게을리 보낸 시간동안 키는 컸어도 운동능력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고 오히려 체력은 바닥을 긴다.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감각을 살린 팀플레이와, 그를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3점 슛이다. 체력이 극한까지 떨어져 의식이 허공을 헤매는 상황에서도 그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뇌까린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난, 더욱 더 불타오르는 남자였어.'

슬램덩크의 다른 선수들은 순수히 좀 더 앞으로,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일찍이 그 곳에 가 본 정대만에게 있어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버린 과거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거칠게 깎은 짧은 머리와 입술 밑의 흉터. 그를 상대하는 자에게 전율을 불러 일으키는 그는 바로 '싸우는 자'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나쁜 기억은 잊고 좋은 기억만 남는다고들 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 쯤은 좋은 시절이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성공한 이들보다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많은 세상에, 어쩌면 정대만은 슬램덩크 속에서 우리를 투영하는 단 하나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좋은 기억은 한켠에 밀어두고 매일매일 현실의 삶과 싸워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시합의 결정적인 순간 3점을 꽂아넣고 몽롱한 눈으로 한 손을 치켜드는 그의 모습은 승리를 상징한다.

나는 자기파멸에도 미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미학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는 자신과 역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면, 슬픔과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딪쳐 이겨나가는 정대만의 모습은 열광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 아닐까.

깃발을 휘날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정대만을 응원하는 그만의 열혈 팬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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