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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만화를 산다는 것, 소장한다는 것

by 노바_j.5 2008. 8. 30.
아다치 미츠루의 [쇼트 프로그램]을 보았다.

고백하자면, 소위 '상업만화'를 사서 보는 것은 마지막이 언제인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오랜만이다. 5학년 때 호주로 떠난 까닭도 있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단행본'을 구입했던 것은 아마도 이명진의 [어쩐지...저녁] 아니었을까(*). [쇼트 프로그램] 역시 일반적인 상업만화와는 좀 다르지만, 굳이 구입했던 것은 단편작품 구상을 위해서라도 두고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3권이라는 짧은 분량 덕분도 있으며, 사실 [쇼트 프로그램]같은 경우는 만화방이나 대여점에서 빌려 보기보다는 차분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봐야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만화책이란 것은 사실 다른 문제보다도 보관과 열람에 있어서 일반 서적보다 무리가 따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쇼트 프로그램] 역시 주문은 시켜놓되 보기는 인터넷으로 다운받아서 볼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만화를 구입하는데에 있어 난감한 한 가지 이유는 그 양이다. 만화가들이 혼신의 힘을 불어넣어 만드는 만화책은 10권이 넘어가지 않으면 비교적 짧은 분량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만큼 한 작품의 양이 상당하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는 만화가 그 종이 한장 한장이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양은 많지만 엉성하게 취급할 수 없는 것이, 쉽게 말해 철자라면 종이가 훼손되더라도 글씨만 알아볼 수 있으면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 문제가 없지만, 만화는 그림 자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거나 출력 해상도가 비교적 낮은 300dpi라는 것도 불만이라면 불만일진데(일본의 단행본을 보면 일단 놀라게 되는 것이 이 해상도의 차이다), 하물며 만화는 여백과 공간의 미학이 중요하기 때문에 페이지의 빈 공간들조차도 엄밀히 따지자면 일일이 가치가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처럼 싼 값에 이만큼의 예술적 결실을 소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치스러울 정도의 축복 아닌가 싶다. 뭐라도 묻을까, 행여 구겨지거나 책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기 전에, 어린 시절 아무런 생각없이 즐겁게 뒹굴면서 만화를 보던 시절도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그 촉감의 기억... 나이가 들면서 촉감이나 후각의 기억이란 것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도 모르게 저 무의식 아래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기억들. 요즈음의 아이들은 그런 원초적인 감각으로 만들어져 가는 추억을 놓치며 자라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요즘 아이들이 놓치는 소중한 것들이 하나 둘이겠냐마는...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형태의 추억들로 대체되겠거니.

'우리의 삶은 만화와 함께 시작해서 만화로 끝이 난다'라는 문장을 보았다([쇼트 프로그램]에서였던가, [황색눈물]에서였던가). 일본쪽에서 나온 말이지만, 우리나라에 대입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만화와 함께 꿈을 키우고 자라서, 만화에서 나온 상상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대여점이나 만화방, 또는 다운로드받는 시스템도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적합하다. 단, 옛날부터 말해왔듯이 문제는 그 수익이 작가들에게 일정지분 돌아가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단일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인지... 그나마 폴더플러스 같은 P2P 공유 프로그램같은 경우는, 영화의 경우 정식등록이 된 경우 천원만 지불하면 어찌됐건 '정식으로' 그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공유프로그램 검색기의 필터링을 생각해보면 이 수익의 일부는 영화제작측으로 돌아가리라 짐작해본다. 아마 시대적 흐름에 따라 앞으로 이런 형태가 정착되리라 기대하지만,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시스템을 구성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못내 크다.

물론 나는 이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 제도 하에서의 대여점과 만화방, 다운로드 관람은 - 나 스스로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을지언정 -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이후 어느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때, 한적한 자연 속에 집을 지어 서재와 미디어 룸만은 따로 두고 싶다.


* 생각해보니 수년 전 호주의 일본서점에서 에가와 타츠야의 [마법동자 타루루토] 1권을 원본으로 산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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