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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0/1987

미궁 이야기 (迷宮物語) [1987]

by 노바_j.5 2009. 9. 28.
중국에는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를 통틀어 '4대 기서'로 부른다고 한다. 쉬이 접하기 어려운 [금병매]를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들은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서 더이상 '기이(奇)'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을 듯 하지만, 만약 문자 그대로의 '기이함'을 모토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4대 기작'을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미궁 이야기]는 그 중의 하나로 꼽힐만 하지 않을까. (다른 후보들로는 [천사의 알], [로봇 카니발], [메모리즈] 등이 떠오른다.)

의외랄까, [미궁 이야기]는 이후 만들어진 [메모리즈]처럼 시간적 구성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메모리즈]는 [미궁 이야기]의 적자라고 생각될 만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처음에 등장하는 '사찌'라는 소녀는 관념화된 '일본의 현대 아이'의 모습이다. 작품 전체에서 '미궁'이라 함은 곧 불안함과 직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에 맞추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불안감을 자아낸다"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 느리고 비통하게]가 천천히 흐른다. 컷과 연출에서도 두드러지지만 1부에서 강조하는 것은 고립(고독)과 단절(분열)에 있다. 시간의 무게, 과거와의 단절. 백(白)과 적(赤), 원(圓)은 '일본'이라는 작품의 배경과 섬뜩함 / 불안함이라는 정서를 동시에 꿰고 있다. 그러나 아이는 거침이 없다. 과거가 쌓은 것들은 사찌에게 이어지지 않고, 아이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 그 모든 것을 통과할 뿐이다.

그리고 [달리는 남자]가 상영된다. 달리는 남자 '잭 휴'는 어떻게 해서라도, 누구보다 빠르게, 1등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 죽음의 레이스 선수들은 기계, 경기... '시스템'에 몸을 구속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부자유스럽고 쫓기는 상황은 현대의 일본인이 놓인 처지를 그리고 있다. 연고도 나오지 않는, '염동력'이라는 초인적인 힘의 본질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1) 시합에 있어서 그것이 부정한 수단이라는 점과, 2) 그것이 상대는 물론 본인에게도 가져오는 끔찍한 결말, 3) 무엇보다도 그 대단한 염동력은 물론 자기 생명에 대한 집착마저도 잊게 할 정도로 그를 몰아붙이는 광적인 강박관념이다.

그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주객이 전도된, 과도하게 발달한 테크놀로지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여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의 열쇠를 기계가 쥐고 있다는 점이다. 또다시 부각되는 '단절'에 대한 불안감. [공사중지명령]에 등장하는 로봇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은유임과 동시에 자의식 없는 인간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똑똑하고 능력도 있는 노동로봇은 그러나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공사의 빠른 완성만을 최우선 목표로 둘 뿐, 제대로 된 개념체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 [공사중지명령]의 결말이 충격적인데, 그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하겠다.

린타로 감독의 작품 제목에 나오는 '라비린스'는 미궁을 뜻하며, '라비린토스'는 이 '라비린스'라는 말의 어원이 된, 신화 속의 미로를 뜻한다. 신화 속의 라비린토스가 숨겨놓고자 했던 것, 인간의 몸과 소의 머리를 가진 미노타우르스는 부정... 더 엄밀히 얘기하자면 불경의 산물이다. [미궁 이야기] 속 미로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작품 전체의 주체자를 맡고 있는 광대가 어둡고 음침한 통로를 건너 사찌와 사찌의 고양이 치치로네에게 보여주는 것은 막연한 불안감의 본질과 그 미래다. 서커스 무대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관객이어야 할 사찌와 치치로네. 서커스의 마지막 단원소개와도 같이, 광대의 뒤에서 여러 형상을 한 생물들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 보기 흉한 생물체들은 - 딱히 나쁜 의도는 없어 보이지만 - 둘을 에워싸고 돌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가장 진하게 혼합되면서 망상에 - 나아가 망상이라는 '미궁'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그대로 주객이 전도된 채, 아이는 즐거워보이지만, 한편으론 광대와 그 무리들에게 거꾸로 놀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시청자는 신화속 테세우스가 그랬듯이 처음에 들어간 길을 따라 다시 뒤로 빠져나오게 되지만, 미궁의 입구는 음침하게 웃더니 '웰컴'이라고 하면서 입을 닫아버린다. 아이를 그 안에 가둬버린 거다. 이것으로 [미궁 이야기]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미궁( * 라비린토스)'에 걸맞는 구성을 갖추고, 그 이야기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어두운 과거, 단절된 신세대, 광적인 강박에 갖힌 현재, 그 강박이 일구어놓은 발전에 먹혀버린 미래, 그리고 이 헤어날 수 없는 전체적인 틀(미로) 속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 빠져나오지 못하고 망상에 사로잡혀버린 일본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의 영어 제목인 '네오 도쿄'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뚜렷이 밝히고 있다. 예언에 가까운 환상곡.

[미궁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어두운 것은 [공사중지명령]의 결말부에 있다. 그때까지 [공사중지명령]의 미궁 최중심부였던 감독실은 용사(스기오카)가 끈을 잡고 용감하게 걸어나가는 순간 다시 그 목표를 재설정하게 된다. 그것은 스기오카, 즉 인간 - 해학적인 차원에서 그야말로 일본인스럽게 묘사된 일본인 - 이 제대로 된 세상을 찾아 다시 미로 밖으로 빠져나온다는 소리도 되는데, 스기오카가 감독실에서 나간 뒤의 통보에 따르면 '세상에 일어난 또 한차례의 변혁'에 의해, 스기오카가 노동기계의 중심부를 찾아 타도하건 말건 이 '미친 짓'은 계속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스탭롤에는 또 다시 짐노페디가 흐른다.

불안에서 시작하여 비관과 냉소, 거기에 작품의 구조에서 보이는 폐쇄성과 치밀함까지, '참으로 일본스럽다'라고 생각한다면 과장된 걸까. 적어도 작품 스스로는 마치 그런 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 하지만, 단순한 가치판단을 뛰어넘는 장인정신과 그 미적 감각은 참으로 멋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