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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85/1983

장갑기병 보톰즈 (装甲騎兵ボトムズ) [1983]

by 노바_j.5 2010. 4. 4.

소위 '리얼로봇의 극단'이라고 칭해지는 [장갑기병 보톰즈]. 그 칭호는 이후 등장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에 의해 의미가 퇴색한 감이 있으나, 적어도 전쟁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아직도 유효하다.

52편이 한 쿨(13화) 당 한 부로 거의 정확히 나뉘어져 있는데, 만화적인 재미는 별로 없고 연식도 있는 작품이라서 딱히 흥미를 돋우지는 않지만, 한 화 한 화의 시나리오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쓰여졌기 때문에 막상 보기 시작하면 술술 빠져드는, 고전스러운 재미가 있다. 1년이 넘는 기간동안 띄엄띄엄 보아온 작품이기 때문에 세세한 분석은 어렵지만, 이야기의 대 주제는 '전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정도로 요약하면 적당할 듯 싶다.

전쟁의 폐해가 뼛속까지 스며든 주인공 '키리코'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성의 회복, 즉 정(情)에 대한 갈구였다. 그의 진정한 적은 어느 특정 인물이나 단체라기 보다는 전쟁의 황폐함과 정치적 이전투구 그 자체에 있는데, 이 점은 입체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다수 창조해낼 수 있었던 여지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각 부의 이야기들이 거의 연계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도, 어떤 특정 대상을 문제의 원인으로 몰고 가지 않기 위함 아니었을까?

[장갑기병 보톰즈]가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사실적인 설정 뿐만이 아니라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점에도 있다. "신이 죽었어도 전쟁은 계속 된다, 그리고 전쟁이 계속 되는 한 이용당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이 세상에 살 수 없다"고 말하는 키리코는 반면 전쟁없는 세상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 사뭇 역설적이면서도 무게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생지옥을 헤치고 간신히 얻어낸 우정과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너무나 소중했던 키리코는 연인인 피아나와 끌어안은 채로 영원에 가까운 동면에 들어간다. 따듯하게 끌어안은 두 사람의 모습 위로 차가운 서리가 낀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성인지향적인 작품이고 굉장히 건조한 느낌이지만, 피아나와의 로맨스 만큼은 굳이 달달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절절하다. 피아나와의 사랑은 키리코에게 있어서 가까스로 찾아낸 해답이자 탈출구요, 빛이었다. 그 간절함은 키리코가 겪어온 고통과 슬픔의 무게에 정비례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피아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사랑은 서로의 아픔까지도 끌어안는 것'이란 말은 이 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어울리는 수식어다. 이런 성숙한 느낌의 로맨스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비슷한 또래(키리코는 18세에 불과하다!)의 철부지 아이들이 전쟁을 멈추겠다며 민폐만 키워가는 근래의 건담을 비롯한 기타 로봇 애니메이션들과 비교하면, [장갑기병 보톰즈]는 영웅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굉장히 무겁고도 인간적이다. 지금까지도 묵묵히 시리즈를 이어가는 리얼리티의 생명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