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010/2008
벼랑 위의 포뇨 - 어른의 사정 따위
노바_j.5
2008. 12. 30. 19:07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진지함이 [원령공주]에서 최고조로 이르고, 이후로는 소위 '감정적인' 모습에서 내려와서 동네 할아버지 같은 감수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같아진다고 하는데, 감성이나 기세의 낙차폭을 생각하면 어째, 이번 작품이 미야자키 마지막 작품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혹은 마지막에서 두번째? -_-;
작품 내의 캐릭터들도 뭔가 새롭고 참신하다기보다는 친숙한 캐릭터들의 새 분장이라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예고편에서도 그랬지만 작중에서는 어머니 캐릭터(리사)가 가장 눈에 띄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떤 전통적인 여성상(像)의, 현실적인 어른 버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캐릭터간 밸런스는 훌륭한데 내러티브는 하울에서와 마찬가지로 빈약합니다. 하울 같은 경우는 미야자키 감독이 도중에 바톤을 넘겨받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지만 포뇨에서도 이런, 내러티브상의 결점이 - 그것도 똑같은 형태로 -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뒷 사연이 있는것인지 미야자키가 고전적 스토리텔링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건지 판단히 모호해지네요. 개인적으로도 요즘 너무 '내러티브'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어떨지...?
[벼랑 위의 포뇨]가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그 작품이 담아내는 분위기와, 그것을 구체화한 미술에 있습니다. 동화적인 느낌! [이웃집 야마다군]에서 비슷한 것이 보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림에 수채화를 넘어서 '파스텔'이 많이 보여지고, 동화는 굉장히 원색적인 단색으로 통일한 것을 보면 확실히 [포뇨]는 아이들의 감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보여집니다. 작품의 내용이나 캐릭터들의 행동에서도 느껴지고, 내러티브의 구조 등 전체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포뇨]는 그간 미야자키의 어떤 작품들보다도 '아이'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어른들의 사정 따위, 알게 뭐냐!'라는 듯한 유쾌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 아이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어른들이 느꼈던 것처럼 중후반에 지루함을 느꼈을지가 궁금합니다.
CG가 아주 안쓰였을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수작업 2D(특히 단색 동화로 이루어진)가 주는 느낌을 보면서 참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아, 이렇게 엄청난 2D라도 화려함, 첫 눈에 느껴지는 스펙타클함은 3D에 미칠 수 없구나' 라던가, '이제는 구시대적인 느낌이 되어버렸구나' 같은 생각도 얼핏 들고... 하지만 동시에 반대로 왜 2D가 좋은지 그만큼 강렬하게 느껴지기도 했구요. 이런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 이제는 마치 지브리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찌 보면 참 서글픕니다. [포뇨]만 보더라도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극초반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작품과 2D가 주는 마술 속에 빠져서 전혀 헤어나오거나 불만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인식할 겨를도 없다고나 할까... 덧붙이자면 그란데마레 였던가요? 포뇨의 엄마같은 경우 수시로 그 형태가 변화하는데 3D였으면 얼마나 괴이하게 느껴졌을까 싶기도 합니다.
예고편에서부터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지금 절정에 이르른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입니다.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움직임의 표현'. 이것은 지금껏 대다수가 추진했었던 어떤 사진같은 리얼리티 혹은 만화적이고 극단적인 과장...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의 기초원칙'과는 궤를 달리하는 느낌입니다. 정말 미묘한 데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잡아내고 표현해냈는지 혀가 내둘러집니다. 이것은 비단 인물들의 작은 동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데, 배경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포뇨가 물고기 파도와 함께 질주하는 부분도 정말 압권입니다.
주 무대가 바다라는 점이나, 갈수록 지금의 일본을 끌어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점 역시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컷'을 꼽으라면 소스케와 포뇨가 배를 타고 나갔다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 [벼랑 위의 포뇨]는 제목의 한글 글꼴도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하고, 한국 주제가 역시 원 버전을 부른 분들이 그대로 불렀는데, 약간 어색한 듯 하면서도 귀엽게 전달되는 그 느낌이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순수하고 아동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유치하다거나 어딘가 어른들이 보기에 부담이 있는 아이들만의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부모들은 특히 가장 공감하면서 볼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법같은 순간, 마법같은 작품...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