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010/2008
비하다 일족 (美肌一族) [2008]
노바_j.5
2009. 8. 6. 19:27
진지함이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아가던 1995년, 우스타 쿄스케의 [멋지다 마사루!!]는 전통적인 열혈-학원-스포츠 물의 패러다임을 우아하게 비틀고 전복시킴으로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모았다. [멋지다 마사루!!]가 희화한 것은 소년 만화를 대표하는 장르들이었다. 그렇다면 소녀 만화를 비슷한 방식으로 비꼬아 보면 어떨까? [멋지다 마사루!!]로부터 10년이 더 지나고, [비하다 일족]에서 그 해답이 보인다.
[비하다 일족]은 그 탄생 배경이 상당히 흥미롭다. 화장품 발매에 앞서 트렌드를 살펴보기 위해 책방에 들린 시바모토 유우코(芝本裕子)는 유달리 눈에 두드러지던 소녀만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우선 고전적인 순애물 풍의 휴대소설을 연재한 후, 그에 걸맞는 70~80년대 풍의 순정만화 / 그림을 동봉한 '비하다 일족 (주: 美肌 - 고운 피부)' 화장품(주로 스킨케어 관련)을 뒤이어 발매,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젊은 나이(77년생)인 시바모토 유우코 사장과 어울리는, 다가가기 쉬우면서도 참신한 역발상이다. 첨언하자면 나도 한국에서 이 제품을 본 기억이 있다(...).
나아가서 이 '비하다 일족'은 컨텐츠 상품화의 길을 걷는데, 제작위원회의 설립에 이은 애니메이션 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30분 분량의 통신 판매 분량 프로그램에서 첫 10분간 [비하다 일족]을 방영하고, 뒷 20분은 '홈 쇼핑의 귀공자'(...)라는 이름으로 통신판매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이 '홈 쇼핑의 귀공자'의 MC가 바로 애니메이션 첫머리에 등장해서 '눈깜빡임 금지!'라는 멘트를 날려대는 '베가스 아지오카'다. 태초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상업 시장에 진출하는 데에 있어서 '끼워팔기 전략'은 항상 그 궤를 함께 했지만 이 정도면 (유쾌한 의미로) 가관이랄까... 어찌 보면 굉장히 독창적이고, 화장품과 순정만화를 기본으로 출발한다는 데에 있어서는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작품 한 편 당의 실제 분량은 7분으로, 복잡한 애니메이팅을 최대한 피해가는 연출이 눈에 띄며 (후반부의 3D 애니메이션은 과분하다!), 음악에서도 많은 부분 기존의 곡들을 차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비하다 일족]은 맛깔나는 구성과 목소리 연기를 통해 충분히 자기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쓸데없이 아름다운 인물들과 고상한 주인공의 말투, 넘치는 과장, 동성애자, 전형적인 콩쥐 팥쥐 / 신데렐라 컨셉의 적용과 치정극... 한술 더 떠서 [비하다 일족]은 소년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열혈 / 근성'적인 요소를 희화화에 쓸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수행과정을 통해 이야기에도 접목시키고 있으며, 또 그 와중에서도 피부미용에 대한 귀띔을 잊지 않는 무서운(...)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은 원작에 비하면 '개그 폭주화'의 경향이 보인다고 하니, 애초부터 이런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애니메이션을 보면 '과연 이 이야기가 상품 판촉으로 이어진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힘들지만(...), 생각보다 높은 주인공들의 나이와, '원래는 아름다웠으나 세파에 찌들어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은' 주인공 사라가 다시 아름다움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의 뼈대는 확실히 현실 여성들을 자극할 만 하다.
[비하다 일족]에는 [기동전사 건담]이나 [북두의 권] 패러디도 들어가 있지만, 이미 작품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패러디이다. 이런 작품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남자가 남자다움의 굴레에서 벗어나듯이 여성도 여성스러움의 껍질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반증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실제 화장품 판매를 위한 판매촉진의 일환이라는 것은 오묘한 느낌을 준다. [비하다 일족]을 보고 마지막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것이 '여성에 의한 여성장르의 비틈'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여성장르의 비틈'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애니메이션만 놓고 봤을 때에는 '여성 장르에도 어느 정도 견식이 있는 남성'으로 그 시청 대상층이 줄어든다는 느낌이 든다. 여성에 의한 본격적인 여성장르 패러디물을 눈여겨 봐야 할 것 같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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