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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0/1990

로도스도 전기 (ロードス島戦記) [1990]

by 노바_j.5 2009. 12. 25.

* 본 글에서 '[로도스도 전기]'는 1990년도에 발매된 OVA 판 작품을 뜻합니다. 원작 소설은 '원작'으로 표기됩니다.

상당히 오랜 인연(?)이었던 [로도스도 전기] OVA를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90년대 초반, 한 게임잡지의 스토리 다이제스트를 통해 이미 줄거리 뿐 아니라 주요 장면들까지(!) 습득할 수 있었던 [로도스도 전기]이지만, 굳이 그런 친절한 미리니름 없이도 내 또래의 아니메 팬들에게 이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독보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년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판타지 장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로도스도 전기]의 비주얼은 가히 충격과 공포다 이 그지 깽깽이들아!!(...)였다. 지금보다도 저작권 개념이 더 희박했던 당시, 잡지 부록부터 책받침 그림까지 서브컬처 판에서 [로도스도 전기]의 그림들은 전방위적 열풍을 불러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마계마인전]이란 다소 멋쩍은 이름으로 원작소설이 번역되고, DVD 정식발매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떴다가 발매 이후 그 저급스런 퀄리티에 무릎꿇고 좌절하기까지... 참 긴 세월 동안 우여곡절을 함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즈부치 유타카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당시 한창 물이 오른 (개인적으로는 이때가 최고 절정기 아닌가 싶은) 유키 노부테루로 이어진 캐릭터 디자인과 전체적인 작화의 퀄리티는 압도적인 퀄리티를 자랑하는 90년대 초반의 OVA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일 정도이니, 그림의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 모르긴 몰라도 역대 수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다. '멈추면 화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작품은 없다.

반면, [로도스도 전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스토리 연출에 있다. [반지의 제왕] 계보를 타는 이런 대형 판타지 풍의 작품은 마치 대편성 클래식과 같은 느낌이어서, 굉장히 세세하게 다루어야 하면서도 스케일이 크고, 동시에 순간순간 다이나믹의 편차가 크다. 즉, 제대로 만들기가 무지막지하게 어렵다!(이런 류의 작품들 중에 성공적으로 영상화된 작품이 얼마나 있던가?). 각 화가 일반적인 기승전결식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데, 전체 스토리를 어중간하게 뭉뚱그리면서 더욱 악화된 느낌이랄까... 음악의 사용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튀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전환점마다 유달리 극 전환이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극중몰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일본애니 사상 최악의 허당 주인공 중 하나로 손꼽히는 '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애초에 판은 로도스 섬이라는 큰 세계의 한 인물일 뿐이고, 사건이 돌아가는 곳에 감초처럼 끼어있어서 구심점이 되는 것이지, 애초에 '원톱' 유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호날두보다는 박지성에 가깝달까. 사실 [로도스도 전기]는 캐릭터성이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흔히 진부하고 전형적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야기 자체라기보다는 캐릭터들의 행동양식 때문 아닌가 싶고. 히로인 디드리트가 차츰차츰 노출도를 높여가다가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장렬하게 한쪽 가슴을 드러내는 걸 보고서는 인간적으로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엘프의 서비스 신에 있어서 완벽한 기승전결을 구가하는 작품이라니!(...)

이 OVA 작품에서 판이 갖는 모순은 요약하자면 '일본만화 주인공스러운 행동거지'와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스러운 실제 활약상'이 빚는 갈등에 있다. 기실 [로도스도 전기]를 큰 관점에서 바라다보면 전체적으로 어중간한 상태에 '끼었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스토리 연출의 예에서도 그렇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서구의 정통적인 판타지와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코드가 원활히 맞물리지 않는 데에서 발생한다.

규모 면에서도 말이 쉽지, 원작소설의 인기만 믿고 검증안된 장르와 감독 등에 대한 모험을 감수하면서 이 정도 퀄리티로 OVA를 12편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엄청난 투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상당히 어정쩡한 형태로 스토리를 담아버리게 되었는데, 이럴 때면 과감하게 팬서비스 개념에 충실했던 [나의 지구를 지켜줘]가 떠오르기도 하고... 어째서 각본이나 감독에 좀 더 숙련된 인물을 쓰지 않았는지, 꽤나 아리송한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분명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공략포인트를 확실히 움켜쥐고 있다는 점이다. [로도스도 전기]는 비주얼적인 퀄리티와 더불어 전체적인 세계관과 분위기 설정에 있어서는 훌륭하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어려운 1차 과제였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제작진은 세세한 스토리를 따지기 이전에, 이런 전체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작품 사활의 핵심이라고 본 것 같다. 이런 판단이나 그 수행력에 있어서는 찬사를 보낼 만 하다. 결론적으로 [로도스도 전기]는 상당히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는가?

단, 한 가지 [로도스도 전기]가 보는 내내 던져주는 의문이 있다면 '작화의 퀄리티 vs. 동화의 움직임'에 관해서다. [로도스도 전기]의 비주얼적 완성도는 더할 나위 없지만, 이런 작화의 퀄리티를 내기 위해 연출 앵글이나 움직임(동화매수)을 희생하고, 또 그것이 가끔 장엄한 느낌은 줄지언정, 안그래도 부드럽지 못한 연출이나 스토리 구성을 더 뻣뻣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하는 의구심은 떨치기 어려웠다. 지금 [로도스도 전기]가 가진 밸런스를 좀 더 움직임 쪽으로 이동시켰다면 더욱 훌륭한 작품이 탄생했을까? 아니면 단지 그 독보적인 위치와 매력을 잃을 뿐일까?

[로도스도 전기]는 차세대 매체로 나아가며 화질이 개선될수록, 그때그때 새로이 회자되고 되새겨질 만한 '미(美)'를 이루어 낸 작품이다. LD를 기반으로 한 이번 DVD판의 마스터링은 많이 아쉬웠지만, 이후에라도 좀 더 좋은 리마스터 버전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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