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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2012

주먹왕 랄프 (Wreck-It Ralph)

by 노바_j.5 2014. 2. 24.

게임 캐릭터들의 대거 까메오 등장으로 주목을 끌었던 『주먹왕 랄프』는 의외로 그렇게 아동층 취향은 아니다. '게임'이 배경이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을 낚을 법도 하지만 사실 요즘 아이들에겐 『주먹왕 랄프』에 등장하는 게임들은 거의가 생소한 코드들의 향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디즈니는 안심했던 것일까? 뚜렷하지 않은 권선징악이나 결자해지, 아이들이 공감하고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성인취향의 테마와 이야기까지... 바넬로피의 톡톡 튀는 캐릭터가 돋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이들보단 어른들 속의 아이들을 위한 작품인 것 같다. 오호, 딱딱한 껍데기 속 동심의 세계라.


수평적이고 다양 미묘한 인간관계를 보면서 여성감독의 영화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먹왕 랄프' 게임에서 랄프에게 가장 딱딱하게 대하는 '진'이 대표적.) 누구한테도 뭐라고 욕하기 힘든... 캐릭터들 태생이 (자기 게임 내에서) 주연 악역 조연 식으로 뚜렷이 정해져 있는 것과 대비해보면 흥미롭다.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장면을 올린다. 디즈니 작품에서 전에 없는 느낌을 전해주던 순간들.


(조금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느낌 처음이야...!


1. 랄프-바넬로피나 펠릭스-칼훈이나 여성 쪽이 기가 센 현대적인 커플이면서도, 랄프와 바넬로피는 부모-자식 혹은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에 가까운 느낌인가 하면, 펠릭스와 칼훈은 아주 현실적인 성인의 교제를 보는 것 같다. 이 커플은 작품 내에서도 참으로 묘한 위치인데, 예전 같으면 극을 이끌어가는 캐릭터가 하나에서 둘 정도였다면 『주먹왕 랄프』는 이 둘을 두 '커플' 혹은 '팀'으로 설정해놓았다. 칼훈을 보면 등장(+랄프와의 만남)이 18분, 펠릭스와 칼훈의 만남이 25분... 바넬로피는 30분 경에서야 등장한다. 작품의 내적인 모티브는 랄프와 그 주변 인물들(펠릭스로 대표되는)의 성숙함이지만, 보아하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외적인 모티브는 바넬로피와 칼훈이 가져가고 남성 주연진은 이를 서포트하면서 내적인 깨달음을 얻는다. '악역 주인공' 이라는 요소보다는 이런 복합적인 인물관계도와 성(性) 역할의 반전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반면 이렇게 차곡차곡 겹쳐가다 보니 작품의 주 악역(안타고니스트)의 등장과 활동이 너무나 늦다 ([나쁜놈 등장! 쿠와아앙~ → 힘을 길러 무찌르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그만 문제들이 꼬이고 겹쳐서 흘러흘러 가다보니, 어라? ....모든게 하나로 뙇!!'). 타이밍이나 전개 면에서 약간 어그러지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일까.


"안돼! 랄프! 멈춰! 멈춰어어어!!!"


2. 서구 애니메이션에서 이렇게 강력하고 감정적인 주인공의 분출 장면이 있었을까. 한편으로 『주먹왕 랄프』는 '태생'과 '재능', '꿈'이라는 굉장히 근원적인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보는 이들을 끌고 간다. 어떤 존재가 되도록 태초부터 '프로그램되어진' 등장인물 들이라는 세계관 자체가 있기에 물 수 있었던 아주 좋은 소재였다. 마무리 부근을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후화나 사회에서 더이상 쓸모없어진 소외층에 대해서도 굉장히 건전한 담론을 담고 있다. 랄프가 목숨을 거는 순간 되새기는 악역 캐릭터들의 구호나 바넬로피의 '오류(glitch)'라는 특성에 대한 용인과 활용도 아주 흥미롭다.


아이디어가 통통 튀는 배경 설정을 활용해서 어느 정도 작품이 항해해나갈 수 있는 방향에 여유를 두고 어른스러운 테마와 실험적인 접근을 보여준 『주먹왕 랄프』. (덧붙이자면 음악도 종래의 작품들에 비교해 굉장히 캐치하고 감성적이다) 「볼트(2008)」와 「공주와 개구리(2009)」등의 상대적인 패망 이후 「라푼젤(2010)」에서부터 다시 움튼,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새로운 진화에의 열망이 가장 극명하게 구현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