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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10/2008

토라도라! (とらドラ!) [2008]

by 노바_j.5 2010. 9. 15.
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 날 중학생 여자아이에게 밥을 해주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빠 요리 잘 하네. 요리랑 예술은 통하는 것 같아.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조화롭게 섞어서 원하는 맛을 내는 거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심코 던진 것 같았어도 상당히 조숙한 발언이었지 싶다. ("네이놈 어쩌다 여중생에게 밥을 해준거냐" 등의 태클은 자제 부탁드린다.)

[토라도라!]는 이런 면에서 볼 때, 환상적인 요리임에 틀림 없다. 일견 보이는 재료의 가짓수보다도 훨씬 다채로운 맛을 낸다고나 할까?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보고 있다가, 한 5~6화 정도 즈음부터는 마냥 감탄만 연발하면서 빠져들어버렸다. 연출, 퀄리티, 디자인, 음악, 애니메이팅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일류의 실력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텍스트(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혹자는 스토리텔링에 대하여 "진부한 이야기란 없다. 진부한 이야기꾼이 있을 뿐이다."라고 언급하였는데, [토라도라!]를 보면 새삼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의 아이디어 풀은, 어정쩡한 유사성에 얽매이게 되는 만화보다는 좀 더 재가공이 자유로운 소설 쪽에 있는지도 모른다. [토라도라!] 애니메이션의 경우, 원작 소설 이후 만화가 애니메이션보다 1년 앞서 발매되긴 하였으나, 작품의 연출을 감안하면 만화를 뿌리삼아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선행제작된 만화나 라디오 방송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 OSMU(원소스 멀티유즈) 개념에서 한층 더 번식한 - '원 소스 다중 매체' 라는 거대한 마케팅 구조다. 작품 하나가 거대한 기업/프랜차이즈처럼 움직이게 된 탓인지, 작품 자체의 스케일에 반해 투입된 물량이 꽤나 어마어마한 것을 느낄 수 있다.

[토라도라!]는 양면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중학생처럼 귀여운 외모로 어필하는 아이들이 알고보니 엄청나게 성숙한, 성인 문턱에 다다른 고등학교 2학년생이라던가. 친숙하면서도 아주 전형적이지는 않은 개성만점 캐릭터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일상적이고 평범한 캐릭터는 오히려 하나도 없다던가. 가벼운 학원 코믹 연애물처럼 보였던 것이 끝나고 보니 전방위적 '삶'에 대한 거대한 담론이었다던가. 어떤 의미로, [토라도라!]라는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은 특정한 캐릭터도 아니요, 이야기도 아니다. 이런 이율배반성이다.

여성적인 심리묘사와 남성적인 욕망을 동시에 꿰뚫고 있는 제작진은, 무언가를 말하는가 싶더니 이내 이야기의 스펙트럼 / 주제를 거듭 확장시킨다. 사랑이 뭔지, 청춘이란 뭔지, 우정, 가족, 꿈이란, 어른이 된다는 것, 믿음과 긍정이란 뭔지 등등. 사실 생각해보면 등장인물들은 이미 제 나름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주인공 타카스 류지같은 경우, 처음부터 자기 생활 전반을 꾸려나갈 수 있고, 나아가 타인을 돌봐줄 수 있을 정도의 역량과 성품을 갖추고 있다. 작품 내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짜 어른'이 되려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현실에서 도망쳐서도 안되지만, 실제 이야기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결국 '보통 어른'이 다시 학생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 -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 - 에 있다.

[토라도라!]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매끄럽다. 그 재미? 열 손가락 안에 꼽아도 될 정도로, 아주 맛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재료들간의 조화'란 기술적 측면에서 한발 나아가, 보는 이와의 진정한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물어보면 사뭇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지조를 지키지 못하는 번잡한 주제의식이, 자립을 이야기하면서 시청자에게는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휘두르기만 하려는 모순된 태도가, 과다하게 밀집된 대형 자본이 뒤에 버티고 선 그 형태가, [토라도라!]에 대한 감탄 끝에 탄식을 부른다. "왜 이리 잘 만든걸까" 하는 모종의 아쉬움. 양극단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한국의 창작인력 태반이 자신의 목표와는 관계없이 온라인게임 업계로 몰려드는 현 세태가 [토라도라!] 위로 겹쳐보인다. 아아, 이것도 시대의 흐름이려니.



p.s. 잉꼬는 아무리 못생겼기로서니 그리 괴기스러울 필요까지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