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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020/2016

배를 엮다 (舟を編む)

by 노바_j.5 2019. 8. 24.

해외에서 오래 살다보니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종종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도 곧잘 접하는 문제다. 직업상 사전을 자주 뒤져보기도 한다. 사실 소통에서의 난점은 단순한 단어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표현의 문제일 때가 많지만, 어쨌든 음... 그렇다. 사전은 중요하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애니메이션은 의미부여에 너무 호들갑스럽다. 작품이 너무나 잔잔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렇게 한 것일까? 바다와 문자 등을 이용한 심적 묘사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나오는데, 정말로 공감이 갔던 것은 최후반부에 검열 실수를 눈치채고 공황상태에 빠지는 부분 정도?

'배를 엮다'의 미학은 고즈넉함을 즐기는 데에 있다. 주인공 커플을 필두로 사전편집부실과 그 속의 사람들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정신없이 바빠보이는 현대 속에서 십 수년의 세월을 거쳐 묵묵히 순항하는, 느리지만 담담하고 확실한 삶의 방향... 그런 '살아가는 방식'이 가지는 매력이다.

2010년 즈음을 기억하는가? 사회생활을 몇년 정도 경험해본 30세 전후의 사회인들이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자아실현을 찾아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해지며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대두되었다. 그것은 세대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그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지금은 젠더 이슈라던가 무기력증이라는 키워드들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세대로 넘어온 것 같지만, 온전한 개인주의라는 화두를 놓고 보면 계속 진행중이리라.)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렇게 다이나믹해 보이는 근대의 움직임이, 사실은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이런 담백한 삶의 형태를 지향하는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신사납게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운명처럼 자신의 해야할 일을 찾아서 일생동안 묵묵히 전념해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 참 행복한 삶이 아닌가 하고. 적어도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일말의 번뇌도 끼여있지 않은, 충실한 삶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실질적인 클라이막스인 10화에서 이런 주제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마지메曰: "무엇인가에 인생을 헌신하는 게 우리를 세상에서 자유롭게 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 뒤의 '잘 다녀와 / 다녀오겠습니다' 클리셰는 뭐랄까 으으음....) 이 10화의 표어는 '긍지'였는데, 엔딩크레딧 직전의 예문 역시도 이러한 주제와 궤를 같이 한다: 「긍지: 자부심, 프라이드. '일에 평생을 바친 자의 ~'」

사실 '아, 저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수시로 들었다. 적어도 나로서는 상당히 동질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마 이 작품에서 가장 만화적이고 작위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명과 배우자를 만나고 그 흐름에 올라탄다는 점이다.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다루어지지만 비중은 그리 크지 않고...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만나고, 깨닫고, 또 그것에 실제로 몸을 담그기까지 하나도 쉬운 일이 없거늘.

그래서 '배를 엮다'는 여타 일본의 영상물처럼 대놓고 교훈적인 메세지를 담기엔 많이 부실한 배이다. 다만, 옛스러워보이는 이런 삶의 형태가 현대인들이 거친 세상의 파도를 건너 닿고자 하는, 하나의 이상향일 수도 있음을 비추어 깨닫게 해 주는 정도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하지 않았나 싶다. 마치 구름낀 바다 건너 저편에 보이는, 햇살 속의 대관람차 처럼.

p.s. 마지메는 말주변은 서투를지 모르지만 의사전달은 굉장히 명확하다(...). 사전 용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표현이 좋은 예!

p.s. 사운드트랙이 ~ 역시 ~ 잔잔하고 어쿠스틱하게 작품의 분위기를 잘 담고 있어서 상당히 듣기 좋다. 귀를 확 잡아챌만한 곡들은 거의 없다는 것 역시도 작품과 닮았다(...). 뭔가 할때 배경 음악 등으로 틀어놓으면 좋을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