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온!!」을 본 반동으로(...) 「BECK」을 읽었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 버전은 스토리나 음악 재현 면에서 미흡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원본인 만화로 선택.
작가인 해럴드 사쿠이시는 「BECK」 말고는 별다른 작품이 없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탄탄한 실력과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편집자를 잘 만난 것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녹여서 작품을 뽑아내는 스타일이어서 그런 건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맞을 듯. 흑인 문화의 용어(?)로 말하자면 '스트리트' 냄새가 풀풀 나는, 현실적인 분위기에 만화적인 요소들을 정말 절묘하게 버무려놓았는데, 비슷한 느낌으로 리얼리티와 만화적인 경계가 교차하는 작품은 고교생이 개나소나 덩크하는 「슬램덩크」 정도가 생각나지만, 적어도 현실-만화의 밸런스로만 따지면 내가 본 만화들 중 아마도 최고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업계'의 묘사가 어우러져서 그런 듯 한데, 좀더 전방위적으로 상황을 아우른다는 측면에서도 좋지만, 온 몸의 움직임으로 묘사가 가득 들어찰 수 있는 농구시합과는 달리 아무래도 음악이라서 헛헛할 수 있는 생생한 표현의 열세를 탄탄한 '환경 묘사' 구축으로 상쇄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그림으로 치자면 인물들은 심플해 보이지만 치밀한 배경을 자랑하는 아다치 미츠루 만화나 「틴틴의 모험」의 한 컷 같달까.
무엇보다도 전반적으로 굉장한 통일감이 있다. 극화체에 가깝고 어딘가 미숙해보이면서도, 본질적인 개성이 날것(raw)처럼 팔딱거리는 인물 묘사 (특히 마호는 어우...♡). 악기들이 어우러지는 것처럼 촘촘하게 넘나들며 짜여진 플롯과 관계구성. 일렉기타나 드럼소리의 질감이 연상되는, 찍을 건 확실히 찍어주고 살릴건 화끈하게 살려주는 작가의 성향. 흑인음악의 느슨하거나 변칙적인 약동감보다는 클래식처럼 깔끔하게 떨어지는 호흡과 기승전결의 흐름. 그렇다, 「BECK」은 작품 그 자체로 록음악의 느낌을 연상시킨다. 작품을 보고 있다보면 - 심지어 기존에 특별한 록 팬이 아니었더라도 - 절로 록음악이 듣고 싶어지는 것은, 록음악 저변에 흐르는 고유의 정서랄까, 록 애호가들의 '마인드셋'이 고스란히 작품에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일체감이다.
참고로 언급하자면 이 만화에서 만화적인 요소란 것은 온 몸이 짜집기된 개를 제외하면 일반 독자들에게 크게 드러나지 않는, 정서적 / 감성적인 부분들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 차원어른들의 사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 유키오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사람들이 집단 주술에라도 걸린것처럼 홀리는 모습이 대표적이지만 (쳇 베이커나 애스트루드 질베르토, 이하나같은 경우를 보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지도... 하지만 락음악에서 음색만으로 이렇게 되는 건 역시 좀 갸웃하다), 태풍으로 무대가 쓰러지는대도 공연이 뜨겁게 계속된다던가, 어른들이 그래도 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결국 세상은 아름답다던가(...)(그래도 레온 사익스는 굉장히 인상적인 캐릭터). 에디 리나 다잉 브리드가 보여주는 유아독존 급의 영향력이나 파급효과를 어느 특정 밴드에서 본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꿈이나 영적인 교감 같은 부분들이 - 정서적으로 극한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인들을 보면 - 더 그럴싸하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현실적인 면에서 볼 때 「BECK」의 세계는 마치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락 씬을 전세계 크기로 불려서 덮어씌워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분명「BECK」은, 비록 기적에 기적을 거듭하기는 하지만(...) 만화잖아? 설득력 있는 전개를 보여주고, 그 중심에는 '음악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대통합'에 대한 기대가 있다. 작품 속의 멍멍이 Beck이나 레온 사익스, 밴드의 대외적(?) 주인공인 미나미 류스케 등이 보여주는 크로스컬쳐적인 면모는 종과 문화, 언어 문제 등을 복합적으로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BECK」이 그려내는 기적이란 것은 단순한 언더독 이야기가 아니라, 실은 이런 근본적인 '차별인식'의 완전한 극복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수록 지구촌화 하는 세상이니, 어쩌면 Beck 같은 개가 출현할 수 있을 즈음엔, 만화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 하지만 지금은 「BECK」이 전달해주는 음악적 고양감에 취하는 것 만으로도, 이 작품을 즐기고 가치를 논하는 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2
p.s. 각 장의 표지 그림으로 유명 음반들의 앨범자켓을 패러디한 걸로도 유명한데(링크1, 링크2), 보다보면 등장인물들도 실제 인물들에서 상당히 모티브를 따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필립 안젤모나 사무엘 L. 잭슨, 스눕 독(Snoop Dogg) 등이 조연으로 차용되고, 영화감독은 아마도 마이클 베이. 각 밴드의 멤버들이나 아티스트들도 나름대로 실제 모델이 있어보인다.
- - 실제로 작품이건 밴드건(=BECK), 외부적인 접촉과 끊임없이 뒤엉키며 이야기를 돌파시키는 것은 미나미 류스케이다. 주인공인 유키오는 미나미 류스케나 에디 리의 존재감을 따라잡는 성장물의 주인공이자 밴드 내부의 중심축 역할이 되는, '내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주인공의 세팅 역시도 절묘하다고 할 수 있을 듯. [본문으로]
- - 마카레나나 강남 스타일, (미약하지만) 한류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리 멀진 않은 것 같다. 일본의 서브컬처 시장은 예전부터 꾸준히 팬층을 늘려가고 있고, 역으로 한국에서도 이젠 일본이나 미국의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문화(드라마 등)까지 향유층이 넓어진 상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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