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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플루타크 영웅전, 양영순을 생각하다.

by 노바_j.5 2010. 5. 7.
우연히 블로그 유입 키워드에 '란의 공식'이 있는 것을 보았다.

들뜨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블로그를 오랜만에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생각이 자꾸 휩쓸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다시금 [란의 공식]을 검색해보다가 [플루타크 영웅전]을 보게 되었다. 양영순 작가가 주 5일 연재를 한다고, 아주 독한 마음을 먹은 것 같다는 소식에 나로서도 기대심이 차올랐던 것이다.

일단 눈에 띄인 것은 예전 양영순의 작품들에 비교해 보았을 때 극단적으로 간소화된 그림이었다. 두번째 느낀 것은 생각보다 지루하다는 것이고, 10여 화를 넘어가면서 들은 세번째 느낌은 '역시 양영순'이었다. 앞선 느낌을 뒤집고 쉴새없이 다음 편을 읽어내리게 만들었으니까.

왜 그 블로거는 쓰지 않았던 걸까. [플루타크 영웅전]도 결국은 연재 중단이 되었다고.


양영순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는 인터넷과 뎃셍력으로 축약되는 작가층 한 세대의 선구자적 존재이다. 사실 아직까지도 순수한 능력 면에 있어서 양영순의 실력이나 개성에 필적하는 작가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가 좋아서 그의 홈페이지 - 지금은 폐쇄된 것 같지만 - 에 드나들다가 다른 이와 언쟁을 벌여서 댓글란을 어지럽힌 부끄러운 기억까지 있는 나로서는, 그의 고질적인 조기종연이 안타깝기만 하다.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느껴지는 것이 많다. 나보다 연배도 위고 경험도 많으며, 작품을 도중에 접는 상황을 몇번이나 거듭한 양 작가의 심경을 온전히 헤아릴 길은 없지만, 굉장히 남성적인 그의 필체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닐까.

상상이란 즉 가능성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구체적인 형태를 띄어나가기 시작하면서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가능성의 여지는 작품이 진행되면서 현실이 되어간 분 만큼, 혹은 그 제곱의 속도로 줄어들어간다. 이것이 뜻하는 의미를 상상하던 사람의 입장에서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이렇다: 재미 없다. 하기 싫다.

이전까지 그려온 이야기가 있기에 앞으로 내가 그려야 할 남은 이야기도 머리 속에서 뻔해지고, 상상은 이미 완결을 맺었는데 현실은 내가 꿈꾸었던 것 만큼 대단한 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느낌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진다. 머리 속에선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하루에 수번, 수십번이나 나를 자극하는데. 현실과 이상의 대비. 새로 하면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 유혹은 자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 할수록 버리기가 힘들다.

하워드 가드너의 [열정과 기질]을 보면, 창조적 대가들은 자신의 창조성을 유지하기 위한 무언가의 강박에 시달린다고 하는데, 소위 예술가가 빠지기 쉬운 일반적인 함정이 여기에 있다. 생각을 옭아매지 않고 상상해야 한다는 강박이 해찰로 이어지는 것. 작업에만 열중해야 할 때에도 항상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반짝이는 상상과 인내를 통한 구현화를 둘 다 해내는 소수의 작가들이 칭송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회가 분업을 이루는 것 역시 단순한 생산효율 측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가능성은 결국 가능성일 뿐이다. 대학교 중퇴는 대졸보다는 고졸에 가깝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온전히 완결을 짓지 못하면, 그것은 사실상 어떤 아무런 실제적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다. 마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일면 다른 어떤 기술보다도 우선시되는 능력이기에, 양영순 작가는 '실력은 좋다'라고 인정받을지언정 장편 작가로서는 반쪽짜리 작가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끝을 본다는 행위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간다. 양영순 작가가 조기 중단한 이전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플루타크 영웅전] 역시도 엄청난 규모의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리어스 시이저(케사르)가 영웅에 대한 강의를 듣는데 그 첫 강의가 테시우스의 이야기였고, 테시우스의 이야기만으로 120여 화를 연재하다 중단할 정도였으니까. 상대적으로 양영순 작가의 성공작이라 할 수 있는 [누들 누드], [1001], [란의 공식] 등의 경우, 모두가 옴니버스 형식이거나 단편 시리즈였다. 지금까지 양영순은 자신이 원하는 대서사적 장편을 완성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 갓 마흔줄에 접어든, 젊은 양영순 작가이기에, 차라리 단편, 중편으로 차츰 호흡을 늘려가면서 마무리짓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전환이 필요하면 전환의 계기를 찾고, 환경이 문제라면 어떻게든 완결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었으면 한다. [란의 공식]에서 머물러 있는 지금 대서사를 꿈꾸면서 "내 생애 최고의 만화를 지금 그린다"는 급한 마음은 버렸으면 좋겠다. 행여 이제껏 실패한 장편들을 뒤돌아보면서 명예회복에 불타오른다면, 카지노에 가서 잃은 돈 찾겠다고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노름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문제가 순간에 그치지 않고 악순환이 될 때에는 그 순환 자체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나의 기대, 남의 기대에 휘둘리는 것 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지금에 충실하는 것이 잡념을 떨치고 온전히 행위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양영순 작가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이 되는 전기를 맞이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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