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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2013

겨울왕국 (Frozen)

by 노바_j.5 2014. 2. 8.

디즈니식 '왕도'로의 회귀

디즈니나 픽사는 전통적으로 장편 상영에 앞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는데, 이번 『겨울왕국』 앞에 나온 "말을 잡아라!" 라는 단편 속 미키 마우스의 목소리는 실제 월트 디즈니의 음성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대중예술 업계에서 민감한 문제인 '저작권'의 주범(?)이 바로 미키 마우스이기에 굳이 다시 흑백 속의 미키마우스를 현대로 불러내는 것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다시 흑백 화면으로 돌아가긴 한다), 호불호를 떠나서 뭔가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겨울왕국』 돌풍의 중심에는 "Let It Go"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그 한방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뜨지는 못했을 작품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디즈니 전통의 뮤지컬 애니가 가진 파괴력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은 첫 화면부터 - 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 뮤지컬 시퀀스로 시작하여 작품 내내 디즈니식 '왕도' 뮤지컬의 길을 걷는다. 리즈 시절 디즈니의 구작들과 비교해서도 그 분량이 높은지는 궁금한 일이지만, 적어도 요근래 작품들 중에선 단연코 독보적인 분량이다. 음악적인 폭 면에서는 구작들과 비교해도 우위에 서 있다고 보인다.


안나가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작품이 끝나고 올라오는 스탭롤을 보면 안나의 이름이 첫번째로 올라가 있는데 이건 우연이 아니다. "렛 잇 고"로 유명세를 떨친 것은 엘사이며 작품 내에서 가장 특별한 인물 역시 그녀이지만, 그녀는 처음 안나에게 상처를 준 이후로 줄곧 안으로만 파고들며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모든 이벤트의 중심에서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안나이며, 그렇기에 그녀는 행동하는 자, 즉 Protagonist = 주인공의 마땅한 권리를 가진다.


어느 시점 이후로 디즈니의 작품들에서는 이야기의 밀도나 개연성, 캐릭터의 강렬함이나 작품 이미지의 상징적인 임팩트가 부족해진 느낌이었는데, 『겨울왕국』에서도 이런 느낌들이 보인다. 잘 만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완성도에서는 떨어진다는 느낌... 연애감정 발전이나 마력으로 생명까지 불어넣는다는 것에는 아무래도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 엘사의 마력이란 것도 꼬투리 잡기가 애매해서 그렇지, 요즘 시대의 (여타 게임, 애니 등 미디어에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십수년만에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건 거의 역대급의 재능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다. 어디 산속 대마녀라도 찾아가 수련했으면 드래곤볼이 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꽤나 큰 의의를 발견한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 그것도 '특별한 사람을 옆에 둔 평범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특별한 주인공'을 버림으로서 캐릭터나 상징성의 약화가 두드러졌을 수도 있겠지만, 전작 「주먹왕 랄프」에서 보여준 '악역의 주인공 화'의 연장선 상으로 보이는 이런 사이드 캐릭터의 주인공화는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흥미로워 하던 부분이었고, 소셜미디어의 보급과 가속되는 양극단화로 인해 소위 '특별하고 잘나가는' 사람들과의 괴리감과 박탈감을 느끼는 저변이 넓어지는 요즈음, 디즈니의 선택은 시대적으로도 - 설령 여러 부분에서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 피해서는 안되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왕도'의 포맷을 차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전하고 또 실험한다는 징후이기 때문에 기쁘다. 그 반대급부로 어딘가 구멍이 생기는 것은 아쉽지만...


위 아 더 월드. 세계촌化

간만에 디즈니 작품을 감상해보니 참 다양성(diversity)이 넓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작품들을 보면서 느꼈던, 그야말로 정말 미국스럽고 양키스러운 일변도 정서에서 이제는 다문화스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다고 해야할까. 실제로 스탭롤만 봐도 이제 미국의 메이저 애니 제작사들은 세계 최고의 재능들의 집합소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예를 들어『겨울왕국』에서도 트롤들의 모습은 분명 미야자키 하야오, 그 중에서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숯덩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고, 위즐턴 공작이 꾀병을 부리면서 '뒷목을 잡는' 모습도 어딘지 굉장히 색다른(한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스탭롤 후반에 보면 작중 "모든 남자는 코딱지를 파먹는다"는 대사에 대한 소송방지 문구를 보면서 피식 웃었는데, 동시에 작중의 상점 주인인 '오큰'의 이미징에 쓰인 인도인 혹은 동성연애자에 관한 스테레오타이핑은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과 각종 소수자의 편에서 그들을 끌어안는 (특별한 인물인 엘사 역시도 소수자의 차원에서 풀이한다) 작품이니만큼, 너그럽게 지나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전작 「주먹왕 랄프」에서는 미묘한 심리묘사나 관계설정에서 '여성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겨울왕국』에서는 수평적이고 다변적으로 인물들이 얽히고 끌어들여진다는 점, 그리고 그들을 품는 포용성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성차별적인 느낌이 들어서 '여성적'이라는 단어는 쓰기가 좀 꺼려지지만... 한방에 이해가 가지 않는가?!) 


드림웍스나 픽사 등, 주변에 기라성같은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일어나 판치는 마당에도, "소외층을 보듬고 다양성을 품는다"는 대주제로 방향을 잡고서 묵직하게 발걸음을 옮겨가는 디즈니의 모습에서 과연 거인, 혹은 맏형의 풍모가 느껴진다.



p.s. "그" 디즈니임에도 불구하고 말들이 유달리 경박하게 달린다는 느낌은... 순록인 스벤과의 차이를 두기 위해서였을까?

p.s. 역시 작품의 메인테마는 '눈사람 만들래'다. 두번째로 좋아하는 곡은 'Fixer Up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