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리스트 나베신의 'Birth of the Cool'
와타나베 신이치로를 언급하는 데에 있어서 음악은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변화를 보여주지만 오시이 마모루와도, 콘 사토시와도 다른 독자적인 지점에 서 있는 이 거장-감히 말하자면-은 애니메이션에서 음악을 느껴지게 하는, 일본 애니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아닐까.
이번 작품은 사운드트랙에서도, 작품에서도 냉소적인 스산함이 느껴진다. 뭉뚱그려 '노르딕'이라 칭해지는 북유럽 음악의 감성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이번 작품이 주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실제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아이슬랜드' 라고까지 짚어 말하니 야릇한(?) 쾌감마저 들었다. 엔딩인 '누군가, 바다를'은 시규어 로스(Sigur Rós)의 사운드가, 오프닝은 노르웨이 그룹인 'A-Ha'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오프닝의 보컬을 맡은 가수도 일본 최북단 출신이라는 점은 우연일까?). 작중 하이라이트인 9화에서 흘러나오는 'Von'도 필청 트랙.
칸노 요코는 초기에 보여주었던 진중함(?)보다는 갈수록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뮤지션이지만, 특유의 천재적인 터치는 여전해서 사운드 자체에 상당한 비중이 있는 현대 노르딕 음악의 느낌도 잘 담아내었다 (근래의 칸노 요코는 독자적인 자기과시보다는 효과적인 콜라보 작업으로 흥미로운 작업물을 많이 내놓는 것 같다). 사실 엔딩곡인 '누군가, 바다를'에서도 많이 놀랐는데, 자기파멸적인 느낌을 이렇게까지 표현한 곡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영상에서는 퀄리티도 훌륭하지만 다른 애니메이션에선 흔히 보기 힘든, 나베신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적극적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보통 조금은 더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소설과도 같은 느낌으로 읽힌다. 나카자와 카즈토 특유의 날이 선 디자인도 등장인물들의 불안한 정서를 섬세하게 살려주며 시너지를 낳는다. 넉넉한 투자를 통해 실현가능해진 것이었을까. (유추해볼 수 있는 제작비 규모에 대비해보면 솔직히 흥행성은 많이 부족한 작품으로 생각되지만. 뭐... 나베신 작품의 생명력은 시대를 초월하니까.)
한 편, 이번 작품은 나베신 버전의 'Birth of the Cool' (쿨의 탄생, 마일즈 데이비스의 1957년작 앨범) 같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초기의 뜨거운 비밥에서 참프루를 거쳐 이 곳으로 이르기까지, 나베신 감독은 꾸준히 조금 더 어둡고 내면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번 '잔향의 테러'에서는 작품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느낌을 준다. '미치코와 핫칭'에서의 정서적 황폐함이나 간절함, '베이비 블루(지니어스 파티 수록작)'의 쓸쓸한 하늘과 철조망, '언덕길의 아폴론'에서도 보여준 근대 일본이란 배경과 암울한 젊은이들 등에서 언뜻언뜻 내비쳐진 그의 시선이 이 지점에서 하나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더불어 '스페이스 댄디'와의 병행 덕분에 온전히 음(陰)적인 감성, 혹은 그간 쌓아왔던 것들을 이쪽에 불어넣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2화 정도라도 추가되었으면 좀 더 완성도 높은 갈무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주인공들... 특히 화이브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어쩌면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함 자체가 이 작품의 '쿨'함을 완성시키는 요소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완성 대신 스타일의 완성을 취했다고나 할까. 이질적인 분위기, 혹은 극단적인 배경 탓에 감정이입이 좀 어려운 것은 아쉽지만... 과하게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애니메이션 역시도 단순히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게는 그 스타일만으로도 꼭 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감독의 의도가 작품을 다 본 뒤에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즉 여운을 남기려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대성공이었다.
이 장면을 보는 것 만으로도 가치는...
p.s.
군데 군데 다시 돌려보고 있자니, 어떤 의미로는 '하이바네 연맹' 이후로 오랜만에 착 가라앉은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의 방향은 상당히 다르지만... 혹은 패트레이버 극장판 2편에서 오시이 마모루가 보여준 정적인 클라이막스도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진짜 일본적, 나아가 동양적인 미학은 이런 정중동(靜中動)적인 느낌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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