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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000/1999

감상 :: 지금, 거기에 있는 나

by 노바_j.5 2005. 9. 28.


이 작품에 대한 저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이런 명작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줄 겸 얼마 전에 비밥을 계속 되풀이해서 봤었습니다. 그러다 강하게 느끼게 된 건데, 역시 애니메이션의 감동과 완성도를 좌우하는 핵심은 각본이라는 겁니다. 물론 기본 테마와 줄거리 개요 등 사전 작업 역시 치밀해야 하지만, 각본은 '스토리'라는 것에 있어서의 최종형태이니까요. 이것은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보통 작품을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좋은 작품을 찾아 이리저리 뒤지던 중, '쿠라타 히데유키'라는 각본가의 이름을 타고 들어간 작품 소개가 바로 '지금, 거기에 있는 나'였습니다. 예전부터 이름만 가끔씩 듣던 작품인데, 작품 설명이나 감상평을 보고 매력을 느껴서 보게 되었지요. 거기에다 음악에 이와사키 타쿠 씨라니!

'지금, 거기에 있는 나'에 대해 간단히 감상을 얘기하자면, (영화를 포함해) 제가 본 어떤 작품보다도 전쟁이라는 것을 잘 그려낸 작품이라는 겁니다.

'지금, 거기에 있는 나'는 보고 난 후의 후폭풍과 여운이 커서 쉽사리 뭐라 하기 힘든 그런 작품입니다. 미래소년 코난틱한 두 주인공과 아동용같은 심플하고 동그란 그림체와는 달리, 이 작품은 처절함과 비참함의 극을 달립니다. 오히려 아동틱한 그림체는 이 잔혹함을 더욱 더 강하게 비추는 역할을 하고, 굳이 잔인한 시각적 표현을 쓰지 않고서도 강렬하게 아픔과 슬픔, 비통함을 보는 이에게 전달해주는 점들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정신적인) 자극이 너무 강해서, 각 화가 진행될수록 다음 편을 보기가 껄끄러워 망설여질 정도였습니다. 다음 편에는 어떤 비극이 얼마나 비참하게 그려질까? 라는 두려움...

'지금, 거기에 있는 나'를 보면서 초중반부터 들은 생각은, '이걸 도대체 누가 보라고 만든 거야?'였습니다. 작품성에 비해 인지도가 적은 것 역시 여기에 있을 듯 합니다. '지금, 거기에 있는 나'는 열린 생각과 함께 작가주의적인 작품을 즐기는 사람, 혹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포맷의 일반적인 틀을 벗어나도 괜찮은 소수의 팬들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대중적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엄청 먼 작품입니다. 그림체는 아동틱하고, 딱히 엔터테인먼트성이나 자극적인 요소도 없습니다. 그런데 속에 들은 내용물은, 보는 사람이 어른이라도 받아들이기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비참합니다. 우선, 애들이 볼 작품이 아니고, 대중적으로 흥미를 끌 만한 요소도 갖추고 있지 않으며, 어른들에게 다가가기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어른'이라는 폭 자체가 너무 좁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거기에 있는 나'는 자국인 일본에 있어서도 굉장히 보기 껄끄러운 작품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결국은 '숨은 명작' 계열에 들 수 밖에 없을듯 합니다.

이 작품에서의 '전쟁'이 특별히 일본의 전쟁을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전쟁이란 것 자체가 한없이 처참한 것이니만큼, 이런저런 요소들을 - 그것도 가장 비참한 것들만 쏙쏙 골라서 - 보여주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일본을 그 대상에서 제외하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실 어느 나라보다 일본 자국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클 수도 있는 것이,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서 일어났을 많은 일들이 녹아들어가 있고, 무엇보다 악역 측이 전쟁의 명분을 표면적으로는 '물이 부족해서'라고 앞세우는... 실질적으로는 단순히 파멸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는 미치광이들로 그려집니다.

 

"내 조부는 전범 아닌 훌륭한 사무라이"

[오마이뉴스 데이비드 맥닐 기자] 도조 유코가 누구의 손녀인지는 얼굴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아몬드 모양의 눈, 가는 입술과 넓은 광대뼈는 2차 ...

n.news.naver.com

(※ 옛날 주소의 기사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댓글 제보로 인해 다시 링크 겁니다. ㅇㅇ님 감사합니다!)


'지금, 거기에 있는 나'는 이런 주제를 훌륭한 완성도로 엮어서, 가슴시릴 정도로 강렬하고 뚜렷이 전달합니다. 언급해봐야 진부할테니 직접 보고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분석을 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몇가지 점들만 밑에 적고 이번 감상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이 작품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캐릭터는 역시 '나부카'입니다. 의식은 깨어있어도 환경에 거스를 수 없어 강압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모습을 만들어가버리는, 가장 현실적인 일반인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만, 자신이 하는 행동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순수함을 어느 정도 입증해주던 존재를 잃은 후 무너지는 모습은 인상적이더군요.

- 처음의 각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역시 훌륭합니다. 전체적인 작품 자체도 그렇지만, 각본 역시 제가 본 것들 중 최상급으로 잘 짜여져 있지 않나 싶네요. 특히 마지막 한두편으로 가면 거의 모든 대사나 장면, 등장인물들의 행동 등이 갖는 절절한 의미가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 성우 기용에서도 참 잘 했다는 인상인데, 인물의 '이미지'에 좌우되기보다는 작품의 주제와 스토리 등을 철저히 파악하고 거기에 적합한 '역할'에 맞추어 성우를 기용하는 점이 두드러졌습니다.

- 음악 역시 뛰어납니다. 이와사키 타쿠씨의 지금까지의 음악들을 들은 결론으로는, 색깔이 강해서(폭이 좁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작품과의 자연스러운 싱크로율은 꼭 좋지는 않은 편인데도, 반쯤은 타이밍, 반쯤은 독자적으로 작품과 같이 묻어나오며 느낌을 전달해 준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훌륭한 음악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참고로 이번 작품의 테마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영향이 강한것 같더군요.)

- 이 작품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점은, 아베리아의 하무도에 관한 맹목적인 충성심의 원천과, 헬리우드가 갖는 차원이 다른 기술력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런 배경에 대해서 유추는 할 수 있지만, 특별한 단서는 보이지 않네요.

- 이 작품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하게 설파하고 있는 것은 역시 '생명의 소중함'입니다. 라라루가 가진 힘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고 여겨지는 '물'이라는 것, 사라의 모습, 시스의 마지막 당부, 물부족으로 인해 황폐한 이차원의 세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