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네타가 있습니다.
편의상 존칭생략은 계속 유지합니다. 그편이 글도 짧아지고 -_-
안그래도 긴 글이 될 것 같으므로, 간략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리고, 라제폰 다원변주곡은 보지 않았음을 미리 밝힌다.
(이미 TV판으로 스토리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되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쓰겠음.)
근래의, '신'과 인간 본질에 연관된, 색다르면서도 진지하고 철학적인 분위기의
근미래형 로봇물들을 꼽으라면 역시 이 세가지가 대표적 아닐까 한다.
파격의 에반게리온.
진보를 표방한 진부, 라제폰.
그리고... 쌩뚱맞은 믹스의 참신함, 빅오.
에바의 티비판 엔딩과 그 이후의 행보는 많은 반향을 몰고 왔지만, 나는 에바와 안노 감독을 싫어한다. 머리를 너무 굴렸거나 무책임했거나 둘 중 하나이며, 어떤 쪽이든 그는 시청자를 기만하고 우롱했기 때문이다. 물론 왕립우주군의 실패도 있었고, 그 자신이 감독이라기보다는 아직도 한명의 오타쿠로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물을 먹은 사람 중 하나로서 역시 나는 그를 싫어한다. 원래 나는 클램프나 가이낙스같은 매니아적 작품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되려 거부감이 들 정도로...
싫다.
어찌되었든 에바는 작품 내외적으로 대단한 파격을 몰고 온 90년대 최대의 문제작이었다. 그리고 에바 열풍이 잊혀질 때 즈음, 새로운 메카물의 정의를 표방하며 달걀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온 녀석이 있었으니, 바로 라제폰.
그러나 라제폰은 그 넘치는 의욕과, 감각적인 느낌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범작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라제폰은 시기상 에바와 동시대 작품이 아니라고 할만한데도 너무 많이 비교되었다.
단순히 그 전 에바가 가져온 임팩트가 너무 커서가 아니라, 그 책임은
라제폰 자신에게도 책임이 꽤 크다고밖에 할 수 없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역으로, 라제폰은 에반게리온을 너무 의식하고 만들어진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아야토의 그림은 완성되지만...
라제폰을 단순히 에바의 아류작이나 졸작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라제폰은 원화의 탁한 색채만큼이나 자기 색깔을 찾지 못하고
스토리나 구성의 완성도와 컨트롤을 잡지 못한 채 붕 떠버렸다.
푸른 피와 차갑게 식은 목소리의 외계인들은 인간 시청자에게서
공감대를 불러오지 못했고, 작품은 감각적이 되려했으나 미수에 그쳤으며,
너무 섬세하게 다루어진 캐릭터들은 개성이 흐트러졌다.
다방면에서, 적정선을 찾지 못해, 그 엇갈림이 결속을 흐뜨렸다.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만큼, 정말 아쉽다...
그리고,
쑈오오오타아아아임!!\(´ Д`)ノ
빅오는 애니, 좀 더 구체적으로는 메카/로봇 애니를 향한
나의 갈증을 완전히 싹 가시게 해 주었다.
나는 지금 빅오가 받는 대접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 작품은 정말 뛰어나다.
아마도 이 작품이 갖는 부당한 평가의 하나는 그 앞에 에바와 쟈이언트 로보라는
대작들이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알고보니 라제폰보다 빅오가 먼저라니 이런 OTL)
빅오를 부분부분 뜯어보면 특별히 새로울 건 없어보인다.
메카는 쟈이언트 로보를 연상시키며,
화풍과 분위기는 배트맨의 그것이고,
무감정 캐릭터의 전형에 메이드를 입힌 인조인간, 도로시.
또 중반 이후부터의 멤버구성은 루팡3세나 비밥의 그것과 흡사하다.
빅오는 '뭔가와 닮았다'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난다.
하지만 빅오는 그런 점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적극적으로 그런 요소들을 채용, 혼합하여
감정이입이 쉬우면서도 입체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전형적인 모습들의 복합물로 이루어진 빅오의 개성은 없는 듯 강렬하며,
이것은 그 소스의 원천이나 혼합하는 방식이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향점을 정확히 알기에, 빅오는 원본들에 휩쓸려 자신의 정체성을 누그러뜨리진 않는다.
이 쯤이면 '닮았잖아!'라며 분노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모든 상상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의 한도 내에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 하나 없다.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카드캡터 자쿠라와 도무요(뻥).
문제는, 이것들을 얼마나 재미있게 조합해 만드냐는 것이다.
마치 얘네들을 어떻게 더 매력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같은 맥락.
빅오는 내외적으로 스타일과 멋이 있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잘 빚어낸 이중성'이다.
단순해보이지만 복잡한것도 같고,
진지한듯 하다가도 유쾌하다.
재즈-락-클래식을 교묘히 뒤섞고 넘나들면서도
일관된 느낌과 완성도로 풍성한 사운드,
어둡고 무거운 색채와 선으로 이루어진,
그다지 다양하지 않은 무대와 등장인물들이지만
하나하나의 매력과 상황을 십분 살려 그려내는 짧은 이야기들은
자체의 템포와 리듬을 가지면서도 하나로 합쳐져 생명력을 내뿜고,
시청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굉장히 컬러풀하다.
일견 단순한 그림 뒤에 녹아드는 복잡한 스토리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묘하게 누그러뜨리고 넘나드는
(이라기보다는 합치고 초월해버리는)
내용과 결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단순 인용과 짜집기인가 싶으면 참신하다.
빅오의 디자인은 쟈이안트 로보와 닮았지만 확연히 다르다.
그 움직임은 둔하고 육중하지만 동시에 다이나믹하고 파괴적이다.
위압감을 내뿜는 강렬한 박력의 몸체에서 나오는 액션과 그 연출은
몸매만큼이나 굉장히 과격하다.
무엇보다도 빅오는 '재미있다'.
눈도 귀도 가슴도 뇌도 즐겁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던져주고,
대단원을 이끌어가는 흐름과 컨트롤, 연출과 구성 등은
돌이켜보면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로 대단하다.
쉴 새 없이 보는 사람을 몰아가고 몰입시킨다.
마지막으로,
에바와 라제폰, 그리고 빅오는 각기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로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인간 본질과 신, 운명 등에 관한 견해의 종점이기 때문에,
사실 이곳이 가장 극명하게 비교되고 또 차이가 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시청자는 이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들 애니메이션이 내놓은 수 있는 결말은 한정되어 있다.
특정 종교를 부정한다던가 할 수는 없는것이다.
하지만 모두는 느끼고 있었다. 이제 옛날 신들의 영향에서 인간이 벗어났다고...
그래서 이들은 구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인간의 힘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시대를 그린다.
이들 모두 고유관념의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다. 어차피 어쩔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에바에서 그것은 미지의 것으로 남겨졌으며,
라제폰에서는 외계인과의 접촉과 개입이 있었고,
빅오에서도 역시 미지의 것으로 남겨져 있다.
인간에 의한 새 시대가 그 전까지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시 되풀이되는 시대 속에서의 차이점은,
비록 그 위에 또 어떤 존재가 군림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이제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다시 만든 세상'에 서 있다는 것 뿐.
인간은 최소한 인간세상의 신으로서 군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거다.
빅오는 에바와 라제폰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에게 조금 다른 생각할 바를 던져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엉뚱한 상상이다.
이것은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비트는 질문이다.
...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빅오에서의 그 '인간 위의 신'의 존재는,
에바처럼 작품 외적(성경 등)에서 찾을 수 있는게 아니고,
그렇다고 라제폰처럼 인간과 동떨어진(외계인) 것도 아니다.
막을 내리는 힘의 대행자. 날개 잃은 짐승. 책(메트로폴리스) 혹은 메모리와 연결된 것.
그것은 만나지 않는 평행선처럼 작품내의 인물들과 함께 간다.
현실의 우리들을 대입시켰을 때 빅오에서만은, 마치 게임속의 인물들처럼,
등장인물들이 우리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의 인물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지구'라는 개념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확신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알 수 없다. '메트로폴리스'라고 하는 책이
세대가 흐르며 '메모리'와 연동되 전승되어가고,
새로운 전승자가, 메트로폴리스의 다음 빈 페이지를
자신이 쓰는 이야기로 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 뿐.
바뀐 작가, 그리고 돋아난 날개.
이것은 인간이 이룩해 놓은 것일까?
아니면 인간은 극 중 등장인물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일까?
혹은 둘 다일까? (자신이 만들고 되풀이하는가?)
아니면 몇개의 분류로 인물 층이 나누어져 있는걸까?
모든 문제에 있어서(예를 들면 위에 얘기한 인간의 위치라던가):
- 위인지 아래인지 (어느 한쪽이 다른쪽을 포함하는지),
- 평행하는 차원인지,
- 아니면 제 3의 진행인지,
최소한 나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끝을 맞이할 수 없는 작은 메비우스의 띠처럼,
우리는 모든 것에서 끝나지 않고 멤도는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인물들의 '자유의지'라는 것조차 실제로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아니면 설정 가능한것인지...처럼.
자아에 대한 신념을 굳히는 장면에서조차 비춰지는 이 '관중들'의 모습은...
작품 내의 설정과 이야기에 조금씩 더 철저히 따른다면,
무언가 더 가까운 해답을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무의미할지 모른다.
슈발츠발트나 이런 애들은 삑사리일까? 아님 예정대로일까?
추리하는 사람은 추리하는 사람대로 즐겁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름대로의 결론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끝낼 수 있다.
아니면 우리네 삶과 신의 존재가 그렇듯이
잡힐 듯 말듯 끝나지 않는 의문이 될 수도 있다.
이 빅오라는 작품이 특별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작품 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매듭지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저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애니메이션에서 '신의 정체'같은,
얻을 수 없는 해답을 강요하는 조바심만 없앨 수 있다면,
빅오는 정말 유쾌하고 참신한, 재미있는 작품 아닐까?
어차피 의문을 여기서 모두 열거하려면 밑도 끝도 없으니...
혹시 언젠가 더 명확한 결론을 얻으면, 다시 포스트하기로 하겠다.
(진구지 사부로를 끝낸지 얼마 안돼서 탐정 후유증이 남아있는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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