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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000/1999

펫 숍 오브 호러즈 (애니)

by 노바_j.5 2006. 10. 26.
줄타기의 최강자
펫 숍 오브 호러즈를 봤습니다. 옛날부터 컬트적으로 인기가 있는 작품이고, 호러란 장르의 적용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기에...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네 편을 모두 보고 귀결된 펫 숍 오브 호러즈의 핵심은, 개인적으로는 '줄타기' 아닌가 싶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의 묘한 틈새에 잘 서있다고나 할까요.

D백작의 모호한 정체성
주인공인 D백작부터 묘한 인상을 풀풀 풍깁니다. 이 사람 정체가 뭔지... 신비함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쭝궈문화의 심오함 뭐 이런 차원을 넘어서서, 남자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호하고,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몇 십 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이었던 것으로 유추되는 장면들이 나오지요. 눈 역시 양쪽이 다른 색깔이고, 이름 역시 'D'라는 이니셜로 상징될 뿐 뭔지 모릅니다.

모토 - 꿈과 사랑 vs. 현실과 위험
D백작은 '저희 가게의 모토는 꿈과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재미있는 점은 그 계약에서 지켜야할 금기사항이란 것이, 고객이 원하는 꿈과 사랑이라는 것에 결정적으로 상반되는 조항들이란 것입니다 (인어편에서만큼은 예외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꿈을 쫓는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꿈을 현실로 이루어나가지 못하는 많은 이유는 그것이 현실적인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은 꿈으로 간직해야만 한다'라던가, 하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관점에서 보자면 애초에 현실로 지켜낼 수 있었던 꿈을 본인의 잘못으로 잃은 후 그것을 D백작의 신비한(말그대로 꿈같은) 동물들로 만족시켜 나가려는, 현실도피적인 고객들의 성격과 꿈에는 어디엔가 어긋남이 있습니다. 꿈이 현실에서 벗어나버렸을 때, 그 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은 D백작이 좋아하는 케이크들처럼 달콤하고, 그가 파는 애완동물들처럼 아름다운 환상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역으로 이 작품은 '현실에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꼭 붙잡아라'라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미 어긋나버린 사람들에게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이 작품에 애착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꿈을 잃어버렸을 때 맞이해야 하는 내적 파국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잔혹한 아름다움
애니메이션은 영화적인 호러 감각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매체이기도 한데(만화보다도 더), 그것은 애니메이션이 본질적으로 죽음이라는 개념과 정 반대인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좋은 첨가물이 되는 것이 아름다움의 감각입니다. 비극에 시리도록 차가운 아름다움이 담겨있는 것처럼... 펫 숍 오브 호러즈는 호러의 서늘한 느낌을 비극의 아름다움과 매치시킵니다. D백작 역시 이런 성질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죠 - 항상 바뀌는, 정숙하면서도 화려한 옷차림이라던지.

호러+미스테리, 현실성과 비현실성
펫 숍 오브 호러즈는 또 미스테리라는 장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사건이나 D백작의 신비함을 간직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유효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의 묘한 감각은 여기서도 빛을 발하는데, 마치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실제로 D백작의 펫 숍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도리가 없지요.

퀄리티, 화려한 스탭진
펫 숍 오브 호러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극상의 퀄리티입니다. 작품이 갖고 있는 특성상 단순히 스토리를 위주로 한 저퀄리티 시리즈가 나왔다면 그 성질을 죽여버릴텐데, 정말 아름답고 선명하게 잘 살려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오프닝만큼은 좀... -_-;; 가수 오빠가 너무 구수해!) 각 작품의 감독들 역시 내로라 하는 감독들인데... 개인적으로는 2편(인어편)이 가장 훌륭하지 않았나 합니다. 스토리 자체의 비극성이나 호러적인 느낌은 다른 에피소드들이 더 뛰어날 수도 있지만, 총체적 완성도로 생각했을 때는 2편에서 보여주는 그 강한 라이팅이나 극적인 대비(컨트라스트),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리'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다른 에피소드들을 보면 중요한 부분에서 작품의 묘한 느낌을 살려내려는 음악이 많이 사용되는데,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의도는 맞았는데 결과물(음악)에 약간 미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녁은 잘 노렸는데 중앙에 맞히질 못했달까... 그런데 2화에서는 이 부분이 에반젤린의 노래로 대체되면서 더 뛰어난 효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이란 감각이 가장 조화롭게 섞인 편 같기도 하구요.

아는 분이 말씀하시길 펫 숍 오브 호러즈는 한 때 '만화 좀 본다 하는 사람이면 소장해야만 하는' 그런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그 독특함과 컬트적인 매력 때문이겠지요. 제가 보게 된 이유 역시 그래서일지 모르고...

펫 숍 오브 호러즈. 마치 작품 속에서 피우는 '향'같은, 그런 작품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