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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5/2001

지구소녀 아르주나 - 웰메이드, 웰빙 애니메이션

by 노바_j.5 2008.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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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주나'란 원래 인도 경전 속의 영웅 / 신 이라고 합니다. 활을 잘 쏘는데, 친지들과 싸워야만 하는 전장에서 아르주나는 흔들리게 되고, 그의 스승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싸워야만 하는 당위성, 그 마음을 가르쳐주고 삶의 이론을 내면적으로 체험하게 하여 존재의 본질을 터득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대로 [지구소녀 아르주나]의 스토리가 됩니다.

보통 아르주나를 알게 되는 것은 칸노 요코, 사카모토 마야, 카와모리 쇼지 등의 이름을 통해서입니다. (카와모리 쇼지 감독의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차기작이라서 당시엔 더 유명했죠.) 저도 알게 된 것은 아주 옛날인데, 환경과 지구에 관한 것이라는 정도만 기억하네요. 리뷰들이 참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구소녀 아르주나]를 틀고 처음 놀란 것은 엄청난 퀄리티입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로 돈을 좀 벌은 건지... (에반게리온에 가려져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니면 마크로스 시리즈 인세 덕인가?) 흥행성이 상당히 낮은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때려박았구나' 하고 절로 느껴지게 됩니다. 스탭진 직함을 보면 알 수 있지만 3D와 디지털의 합성에도 엄청나게 공을 들였고, 무엇보다도 어떤 화면상의 퀄리티보다 연출, 구성, 각본 등을 포함한 작품 전체가 훌륭한, 그야말로 '웰메이드' 작품입니다. 오히려 흥행성이 낮은 만큼 높은 질로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생각도 엿보입니다.

내용, 의식, 개념 면에서는 그야말로 찬사가 아깝지 않습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롯, 비슷한 주제의 애니메이션들은 많았지만... 아니, 이렇게 정면에서 일직선으로 부딪히는 작품이 있었다니! 13화라면 상당히 짧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농업, 과학, 사회, 종교, 교육, 문명, 기아, 의학, 언어, 임신, 가족, 식품 등등등... 정말 안 짚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전방위적인 범위와, 또 자연스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깊이를 자랑합니다. (덕분에 대중적 요소인 연애이야기는 보면서도 상당히 하찮은 느낌.) 현실적인 체험, 체감과 비교하면서도 공감에 또 공감을 거듭하게 되더군요. [지구소녀 아르주나]가 가장 공들이는 부분도 '현실감', 즉 리얼리티에 있는데, 이 작품이 얼마나 진지한 태도로 대화하고자 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현실감을 중시했다고는 해도 캐릭터 디자인은 살짝 아쉽습니다. 무난하고, 작품에 어울린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만 뛰어나다고까지 하기는 어렵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가, 즉 감독의 철학의 깊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100% 동의하는 바이기 때문에 더욱 더 감명깊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이 다르거나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 애니메이션이 공감을 이끌어내고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는 또 하나의 의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인식, 그리고 모든 것을 긍정하는 마음가짐이지요. 그리고 콕 찝어서 얘기하지는 않지만,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분별, 즉 선과 악으로 나뉘는 이원론적인 사상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칸노 요코의 음악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자기주장을 죽이고 작품 전체에 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어쿠스틱한 점에서 에스카플로네와 가장 비슷하지만, 더 편안하고, 부드러우며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성우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신디 역의 신타니 마유미 씨는 참 인상적인 성우입니다. 출연작이 그리 많지도 않은 것 같은데, [브리가둔~마린과 메란]으로 처음 접하면서 독특하다 싶더니, 이후에는 [프리크리]의 여주인공 하루하라 하루코에서 보고, 이번에 또 [지구소녀 아르주나]에서 보게 되네요. 그 '딱' 하고 떨어지는, 독보적이고 강렬한 개성(테가 빗나갔다고나 할까-ㅅ-;;)이 있는 성우같아서 듣는 저도 희열(?)을 느낍니다.

카와모리 쇼지는 역시 세세한 부분에 몰입하기보다는 전체를 아우르는 총감독 스타일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결투(?) 씬의 그것은 딱 마크로스 극장판이나 마크로스 제로의 그것과 같더군요. 나름의 미학인지도?^^ 그리고 각본 면으로는 극후반에 크리스와 토키오의 관계에 있어서 약간의 혼선을 불러오는 것 같아 살짝 아쉽습니다. 연출면으로는 의외로 도쿄 붕괴 후의 '8일 후 / 9일 후 / 10일 후'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충격적이랄까... 극도로 단순하면서도 효과는 극대화시키고, 정말 멋졌습니다.

[지구소녀 아르주나].
개념부터 표현까지, 진정한 웰메이드 작품을 보고 싶으시다면 강력하게 추천해드립니다.

p.s.
4화부터는 정발된 디렉터스 에디션으로 보았는데, 스페셜 피쳐나 속지가 없다시피 한 것은 이해하더라도 자막의 부실함은 어쩔 수 없이 안타깝습니다. 가끔씩은 한국말 더빙을 받아적다 실수한 것 같은 모습까지 보이는데... 예를 들어서 6화같은 경우 연달아서 '불임 인자'를 '프리민자(이런 단어 없습니다 -_-)', '종자'를 '정제', '(식품 등의)자급'을 '자금'으로 오역하고... 영상으로 띄워주는 각종 단어들까지 번역하기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지켜야 할 선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가슴 아팠습니다. 결국은 DVD 제작사 측의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니까요.

아무리 DVD가 부실하다고 지적하더라도... 저는 제발 정식발매가 꾸준히 이루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