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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5/2001

마징카이저 OVA - 쏘 크레이지한 나가이 고의 향기

by 노바_j.5 2011. 6. 1.

나가이 고의 (아마도) 가장 건전한(?) 작품인 마징가 시리즈. 마징카이저는 그 마징가의 최종진화물이다. 처음 슈퍼로봇대전에 등장해서 대중의 주목을 받은 뒤 2001년 처음 애니메이션으로 그 모습을 보였을 때, 열혈 팬층이 상당히 흥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짧은 0.5쿨 (7화) 분량의 OVA였지만 이야기는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졌고, 나가이고 특유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훌륭한 퀄리티를 보여주며 좋은 인상을 남겼다.

[마징가Z]는 애니메이션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형 로봇에 사람이 탑승해서 싸우는 로봇 애니메이션 장르를 개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나가이 고 특유의 개성을 십분 살린 [마징카이저]를 보고 있자니, 어쩌면 나가이 고 개인의 업적이란 것은 장르 개척 수준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에 미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노친네들 머리싸움
주인공 카부토 코우지(쇠돌이)의 할아버지이자, 마징가 시리즈의 개발자인 천재과학자 카부토 쥬죠의 병적인 손자 사랑은, 무적의 병기를 만들고선 손자한테 '이건 너한테 줄거니까 네 멋대로 신이 되던 악마가 되던 알아서 하라'는, 사실상 작품 내에서 누구보다도 정신 나간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닥터헬과 아수라 남작은 이미지를 떼어놓고 생각하면 - 물론 인두겁을 벗겨버린 철가면 병사들을 보면 악랄하기 그지 없지만 - 그 나름대로 상당히 아름다운 주종관계처럼 보인다. 카부토 쥬죠와 닥터 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결국 엇비슷하게 미친 두 사람의 성패를 가른 것은 '자가개발'이냐, '외세 의존'이냐 정도의 사상 차이밖에 없다.[각주:1] 등장인물, 특히 아군 파일럿들이 제아무리 근성이나 열혈을 외친다고 해도 결국 힘의 차이를 불러오는 것은 단순한 기술력의 차이일 뿐이다. 냉소적인 시각에서 보면, 기껏 남이 만들어준 힘을 과시하면서 "보았느냐 마징가의 진정한 힘을! 이 마징가는 절대 지지 않는다!" 등의 구호를 외쳐대는 코우지와 테츠야는 상당히 한심한 인물들일지도 모른다. 

"어우~ 변태같애!"

괜찮아!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은 아마 일본 팝컬쳐 매니아, 소위 '덕후'라면 심심치 않게 들어봤을 법하다. 단순히 '야하다'기 보다는 '변태적'인 감각. 말하자면 '쓸데없이' 야하고 '쓸데없이' 잔혹한, 그러면서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눙치는 듯한 이 응큼함은 특히 인조인간 소녀부대 '카미야'와, 역시 쌍둥이 자매인 로리와 롤이 부각되는 3~4화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재미있는 점은 '진지할 때'와 '눙칠 때'와는 그 분위기 차이가 이질적일 정도로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뭐랄까, 이것도 역시 굉장히 일본스럽달까... 일본에서는 똑같은 행동을 해도 상황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반응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사무라이는 뭔가 조금만 잘못 엮여도 바로 목숨이 날아가고, 각종 분탕질은 '중차대한 일을 맡고 있고, 언제든지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진지한 남자들이라면, '그 정도 여흥 쯤이야'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물론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는 식의 판단은 하기 어렵다.)

[마징카이저]의 이런 점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마초적인 사상과 혼합된 윤리적 모호함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크레이지'하다는 것으로 생각이 귀결된다. 어찌 보면 "힘이 곧 정의다" 로 생각할 수도 있고... 하여간 딱히 건전하다고 하긴 힘들다. 쾌락은 좋은데 알고 보기는 하자.

이런 점들이 굳이 나가이 고나 마징카이저만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쩌면 이런 요소들을 전면적으로 끌고 나온 것은 나가이 고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을까... 그는 데츠카 오사무나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예컨데 '사파'의 교주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갈수록 매니아적인 작품들이 유행인 요즘, 어쩌면 그가 미치는 영향력은 정파의 수장들 이상일지도... 다만 요즘 작가들과의 차이점이라면, 악마적일 정도로 지독한 느낌의 나가이 고에 비해,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시대의 작품들은 집착적이기는 하지만 훨씬 가볍고, 개인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1.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되 일본의 정신을 유지한다"라는 일본의 사상이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부분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