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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10/2007

천원돌파 그렌라간 [2007]

by 노바_j.5 2009. 5. 26.

네 드릴로 하늘을 뚫어라! - 천원돌파 그렌라간

모 웹사이트에서 이 애니메이션 - [천원돌파 그렌라간] - 에 대해 흩어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우리가 왜 거대로봇물에 열광하는가, 왜 그것이 유행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기를 끌고 있는가, 왜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 지지는 계속 이어지는가' 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다는 문구였다. 그리고 이것은 - 제시된 주제만을 바라보는 지극히 어리석을 수 있는 감상태도를 불러옴에도 불구하고 - 고스란히 그렌라간을 지켜보는 큰 포인트가 됐다. '내놓은 해답이 뭘까?'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장대하고 세심한 성장물'이란 일종의 '포맷'이라거나, '지하에서 빛을 찾아, 부당한 금기에 저항하며 하늘을 향해 나아간다'는 어떤 원천적인 '동기', 혹은 중반 이후 드러나는 '나선'이라는 것이 내포하는 인류에 대한 긍정적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때에도 그다지 명쾌하게 잡히지가 않는다. 유일하게 가닥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유지' 혹은 '계승'의 테마이며, 이것은 초반의 {카미나의 아버지 -> 카미나}부터 시작해서, {카미나 -> 시몬}, {시몬 -> 그렌단 -> 미래의 세대}, 마지막으로 {작품(시몬) -> 시청자}로 이어지는 일관된 표현을 보여준다. (특히나 로시우에게서 명확히 볼 수 있는 성우 변경 등을 이용한 표현은 인상적이었다.) 보통 거대로봇물의 경우 로봇이란 절대적인 힘의 존재가 부모 -특히 아버지- 의 존재를 대체하는 성향이 강하고, 또 여기에 따라오기 쉬운 일종의 '갈망'같은 것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런 부성의 부재나 계승의 테마만 가지고서는 아무래도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이낙스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지막 두 편인 26화와 27화에서 내적과 외적으로 나누어 하나씩 나누어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26편에서의 그 풀이와 표현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 '로봇'이란 것은 겉으로 보았을 때에는 물론 그렌라간이지만 시청자를 시몬의 위치에 대입시킨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슈퍼로봇'의 존재란 시몬에게 있어서는 카미나라고 할 수 있다. 힘을 불어넣어주며, 굴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강한, 절대적 존재라는 상징이자 우상. 그런데 하나 놀라운 것은 그 카미나가 시몬과 요코의 꿈 속에서 어떻게 나오는가이다. 즉, '그들이 원하는 세계 속에 있기 바라는, 온전한 카미나'라는 것은, 그들을 일깨워주는 - 현실로 돌아가고 마주하게 해 주는 - 힘을 가진, 또 그 길을 제시해 주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카미나의 혼 같은 것이 능동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 보는 카미나의 모습 역시 꿈꾸는 시몬이나 요코의 입장에서 만들어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인상깊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의 마무리를 옹호하는것 같아서 약간 찜찜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마지막 27편은 거대로봇의 원초적인 '힘'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을 26편이 아니라 그 뒤인 마지막에 위치시킨 것은 분배나 구성의 미를 감안하더라도 아무래도 어딘가 석연치 않다. '막판에 한번 마음껏 날뛰어보자'라는 느낌... 가이낙스 답다고 해야 할까.

이 어쩔 수 없는 '가이낙스 스러운' 느낌은 개인적으로는 많이 안타까운 부분인데, 시리즈 중반까지는 - 어쩐지 동떨어진 듯하게 느껴질 정도로 괴팍한, 그래서 마치 스토리진행을 위한 장치같이 다가오는 아텐브로라는 캐릭터를 빼놓는다면 - 딱히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적절하게 버무려진 매니악함과 유머, 더욱 자유로워진 실험/혼합정신, 거기에 가이낙스 특유의 질높은 '애니메이팅'을 보면서 '아 참 긍정적으로 매니아성을 발전, 발현시켰구나' 하고 굉장히 기쁘게 받아들이며 보았었다. 그러나 막바지로 접어들 수록 이 매니아성은 과도한 극단성을 보여주는데, 전투나 머신의 스케일은 그나마 [톱을 노려라] 시리즈에서 내려오는 전통(?)이나, 정말 '거대로봇물'의 의미와 끝을 본다는 대의를 생각하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2기에서 볼 수 있는 정치관계, 특히 로시우와 키논의 태도는 혼네와 다테마에가 나뉜다는 일본인의 정서를 고려해 봐도 설득력이 조금 부족해보이며 (이것은 아마 과도하게 현실적인 과묵함이 전체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빚어진 것 같기도 하다), 요코에 대한 처우라던가 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학살(?)을 보면 솔직히 억지스럽다는 - 충분히 수긍할만한 이유 없이, 그저 어떤 분위기나 미학을 자아내기 위한 것 같달까 - 느낌이 강하게 든다. 뭐, '세상은 구했으나 개인은 불행한' 쪽의 끝맺음(그것도 살짝 어처구니 없는!) 역시 어떻게 보면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에 상당히 자주 나오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지적하고자 했다면 이해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정말 잘 만들어놓은 애니메이션에 굳이 마지막 고집을 부려서 그 끄트머리를 깎어먹는 것 같은 모습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아까 잠깐 언급했지만 표현기법은 여전히 훌륭한데, 특히 애니메이팅 기술적인 면에서는 근래 일본 '아니메'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법(+알파)이 쓰이지 않았나 싶고, 가장 의외성이 강했던 것은 13화의 풀애니메이팅 기법이었다. 그 기법이 사용된 것도 의외였고, 그 기법이 가져온 효과가 제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것도 의외였으며, 이 모든 것에 의외라고 느끼는 것마저도 역시 의외였다(...). 그 시퀀스 자체는 요코와 시몬이 갖고 있었던 또다른 가능성을 비춰주는 대목이라 굉장히 인상 깊은 부분이지만...  그리고 사운드의 경우 역시 훌륭했는데 이와사키 타쿠가 마치 진일보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간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한작품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여서 그런 것일까. 열고 닫는 노래들도 좋았다.

인상적인 캐릭터는... 솔직히 너무 많다. 꿈 부분에서의 로제놈과 비랄도 짠했고 (나이가 드니까 갈수록 미묘한 부분들에서 감동을 느낀다), 개성이나 존재감에 비해 한발짝 물러선 듯한 리론, 역시 포텐셜이 높은 레이테도 흥미로우며, 캐릭터의 취급을 생각하면 아텐브로랑 요코가 돋보인다. 아텐브로는 상기 언급했듯이 스토리 진행을 위한 장치인가 싶을 정도로 유달리 괴팍하지만 그것이 후반부에는 일종의 쾌감을 선사해주기도 하며, 요코는 화려한 액션과 매력적인 모습의 소유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련하고,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첫사랑의 기억'의 아이콘으로 끝까지 남는다. 이렇게 보면 메텔과도 비슷한것 같지만 [그렌라간]의 요코는 주변인물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 느낌이나 위치가 참 미묘한 경우다. 작품에 희생된 이미지가 겹친달까. 되려 카미나같은 경우 그렇게 크게 참신하다거나 한 느낌은 없지만... 기존의 거대로봇물 주인공이 갖는 캐릭터는 카미나와 비랄의 두개로 양분되었다. 시기별로 역할이 겹치지 않으니 슈퍼로봇물 특유의 '열혈'에 대한 공유점은 있지만, 카미나에 [무적강인 다이탄3]의 하란반죠같은 자신만만함과 [멋지다 마사루!]의 마사루같은 바보스러움(혹은 '아이'스러움)이 합쳐져있다면 오히려 비랄같은 경우가 꼬여있지 않은 정통파(?) 히어로의 계보를 연기하고 있다. 일단 2기에서의 그는 분명히 [진 겟타로보]의 나가레 료마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그렌라간]의 캐릭터들은 그 외에 언급하지 않았어도 조연이나 크리쳐까지도 심심한게 단 하나도 없다. 작품 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모습이 또 대단하다.

그런 캐릭터 분야 뿐만 아니라 초반부터도 구성력이나 디자인워크 등에서 이미 두드러지지만, 전체적으로 "정말 제대로 준비했구나" 하는 인상을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개인적인 불만사항은 가이낙스의 성향적인 문제에 많이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자체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대단한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 극장판인 홍련편은 보지 않았음.
* 패러디 중에서도 초반의 크로스카운터 패러디는 압권!
* 나는 이노우에 마리나의 목소리가 참 좋다. [바카노!]의 이브 제노아드 때에도 깜짝 놀라서 누구인지 찾아봤었는데... 과연 2000:1은 허울이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