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6~2010/2007

에반게리온: 서 / Evangelion: 1.0 - You Are (Not) Alone [2007]

by 노바_j.5 2010. 9. 11.
IPTV로 [에반게리온: 서]를 무료로 시청할 수 있길래, 오랜만에 에반게리온을 보았다. 등을 돌린지 오래되었지만 의외로 세세한 부분들까지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놀란다. 사춘기 시절의 애증이란 오래 남는 것이려니.

원작 이래 끊임없이 되풀이된 세계관의 확장과 우려먹기의 진수. [에반게리온]은 여러모로 아이러니한 작품이다. 팬들에 대한 적극적인 조롱, 그리고 그에 부응하는 엄청난 파급력과 수입. 오타쿠가 오타쿠를 부정해서 오타쿠를 열광케 하고 오타쿠의 지갑을 열어 오타쿠의 배를 채운다 (비교적 일반적인 대중층이 에반게리온 만은 챙겨보기도 하는 별난 양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제작사인 가이낙스 역시 [에반게리온]을 기점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매니아 성(性)과 자본주의 논리의 양 극단을 동시에 꿰고 있는데, 어찌보면 속된 말로 '꽃뱀'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극중 무대는 흡사 극장판 ([사도신생: 데스 앤 리버스]~[에어: 진심을 너에게]) 에서의 '서드 임팩트' 이후 새로 태어난 세계에서 되풀이되는 상황극, 혹은 패럴랠 월드 정도의 세계관 같다. 그러나 '떡밥' 물기는 여기까지.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에반게리온: 파]에서 새로운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대두되는 것에 비해 본 [에반게리온: 서]는 말그대로 서막을 알리는 작품이라는 인상이다. 새로운 느낌으로 원작을 재현하여 물씬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상과 음향 전체에서 느껴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다. 이런 느낌들은 채색이나 녹음 품질 등에서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지만, DAT 테입 같은 극중 소품에서도 보이듯, 전체적으로 구시대와 현시대가 맞물린 듯한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사실 영상매체의 팬이라면 누구나 꿈꿔보는 '고전 명작의 리메이크'를 거의 그대로 재현해낸 이런 작품은 극히 드물다.) 시대와 함께 진일보된 작품의 질감에 더불어 성우들의 연기 톤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특히 미사토 같은 경우는 문득 '성우가 교체됐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뉘앙스가 달라진 부분들이 있다. 성우인 미츠이시 코토노 역시도 90년대의 재기발랄하고 원기왕성한 에너지보다는 원숙해졌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이 부분은 OST를 듣고서 확신이 생겼다). 이래저래 세월의 흐름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TV판 대여섯 편의 분량을 극장용으로 압축하다보니 초반 도입부는 특히 분주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감을 찾기는 하지만, 가이낙스 특유의 기질(?) 탓도 있어서인지 전체적으로 조금 극성맞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폭주중인 초호기도 너무 말(?)이 많다). 단, 극중 절정에 이르는 마지막 전투는 본격적으로 재구성되었는데, 원작에서는 가장 밋밋한 사도였던 라미엘의 화려한 부활과, 완전히 새로워진 시퀀스들, 극적인 애니메이팅 효과 등이 어우러져 강렬한 임팩트를 던져준다. 레이와의 관계 변화가 더욱 더 극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특히 조준 스크린에서 신지 - 에바 초호기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감탄스러웠다. 애니메이팅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차별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가이낙스이지만, 한층 기합이 제대로 들어간 이번 신극장판 같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런 퀄리티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황송하기까지 한 기분이다.

원작에서 화면구성을 고스란히 가져온 대부분의 경우 원작의 원화를 있는 그대로 모사한 것 같은데, 원작에서 작화붕괴가 아쉬웠던 몇 장면들 (병원 복도에서 돌아보는 신지의 얼굴이라던가) 역시도 그 느낌이 그대로인 것은 살짝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