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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10/2007

정령의 수호자 - 담담한 차(茶)와도 같은...

by 노바_j.5 2011. 3. 26.

나이 서른의 여자 호위무사가 길을 가는 행상인과 대화를 나눈다.
"...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 땅에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있지.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아."

[정령의 수호자] 1화 초반의 이 장면은 시청자에게 스스로가 어떤 작품인지를 강력하게 어필한다. "애들 눈높이에 맞춰줄 생각은 없다"라는, 일종의 포고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때 전후의 대화에서 놀라게 되는 것은, '정비'라는 말 대신 "메인테넌스"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과, 위 대사에서 오는 겸허한 태도와 생각의 깊이, 그리고 가감없이 자신을 서른이라고 이야기하는, 정말로 서른다운[각주:1] 주인공 바르사의 모습이다.

[정령의 수호자]에는 과장스러운 면이 거의 없다. 바르사라는 캐릭터의 매력, 이국적인 문화들과 판타지적인 요소가 뒤섞인 동양풍의 세계관, 탄탄한 퀄리티 등은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지만, 그 어느것도 요즘 시대가 원하는 자극적인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소설 원작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 역시 그 완성도에 있어서는 훌륭하지만,[각주:2] 억지스러울 정도의 극적 감동을 자아내지는 않고 참으로 '원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탄산음료의 시대에 만난, 담담한 차 맛 같은 느낌이랄까.

[정령의 수호자]의 큰 줄거리는 마물이 몸에 깃들어 궁궐의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제 2황자 챠그무를 바르사가 호위한다는 내용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큰 주제는 '영웅'에 대한 담론이다. 지그로에게서 바르사로, 바르사에게서 다시 챠그무로 계승되는 '영웅의 마음가짐'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뒷면, 영웅이란 '호칭'의 허황됨이다. "영웅은 자기가 되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지그로의 말은, 진정한 영웅은 자신이 필요되어지는 순간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와, 영웅의 '호칭'은 스스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남이 붙여주는 것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르사는 그런 운명적 순간을 맞이하여 전력을 다해 챠그무를 지켜내고, 궁궐의 높은 사람들은 치세를 위해 어떻게든 챠그무에게 '영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입히려 한다.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이 작품의 내적인 주제 중 하나는 '혈연관계'의 극복이다. 황제는 - 비록 진심으로 아들을 아낄 망정 - 철저히 국가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치국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비정함을 보인다. 챠그무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혈연관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서로 정으로 끈끈하게 얽히고 서로 협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단 한 가지, 이 '정'을 군데군데 '모성'이란 단어로 구분해서 강조하는 점은 그다지 탐탁치 않다. 작가는 황제가 챠그무를 대하는 모습에서 "부성애가 짋어진 굴레"를 내보이며,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우월하다는 듯한 생각을 넌지시 내비치는 듯 하다. 그러나 지그로가 바르사를 기르고 보호해 온 것을 간단하게 '그건 모성'이라고 이름붙여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굳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도 모성애가 부성애를 뛰어넘는 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거늘...

마지막 장면에서 바르사와 탄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는 아리송하게 처리되는데, 바르사가 목걸이를 두 개 꺼내드는 것이 무언가의 암시 아닌가 싶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또다른 '수호자' 시리즈를 위한 포석, 혹은 원작 구입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참고로 원작 작가인 우에하시 나오코는 이 '정령의 수호자'와 함께 '꿈의 수호자', '어둠의 수호자' 등의 '수호자' 시리즈로 각종 상을 휩쓸었는데,[각주:3] 모두 바르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이며,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어 나와있다. 우에하시 나오코는 또한 [공각기동대]의 팬이라서 자연스럽게 [공각기동대] TV판의 스탭들이 제작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흥행에 실패하면서 '수호자' 시리즈 전편의 애니메이션 제작이 물건너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원톱 여주인공의 인물 됨됨이나 전체적인 분위기 등에서 [정령의 수호자]와 [공각기동대] TV판은 닮은 점이 많은데, 어디에서 흥행성적의 차이가 왔을까를 생각해보면, 원작의 인지도 차이, 그리고 SF와 동양 판타지라는 장르의 차이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오프닝과 엔딩의 생뚱맞은 느낌[각주:4]도 아쉽지만.

그러나 세세한 것을 떠나 전체적으로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자극적이지는 않아도 완성도 높은 스토리와 작품을 추구하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다. 특히 사실스러운 분위기의 동양 환타지물 치고 이렇게 퀄리티가 높은[각주:5] 경우는 굉장히 보기 드물다.



  1.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정말 그 나이답다고 생각할만한 인물은 흔치 않다. 하물며 서른의 여자 호위무사라니. [본문으로]
  2. 스토리적으로 유일하게 이상하다 싶은 점은, 왜 숨어있는 몸이면서도 마을에서 이름을 그대로 쓰느냐 정도? [본문으로]
  3. 노마 아동문예 신인상, 산케이 아동출판 문화상, 일본 아동문학자 협회상, 소학관 아동출판 문화상, 아동복지 문화상, 로보노이시 문화상, 이와야 사자나미 문예상 등 [본문으로]
  4. 오프닝은 작품 본편과도 충분히 달라붙지 못하는 느낌이고, 오프닝 그 자체로서의 매력도 없다. 엔딩은 마치 바르사가 챠그무를 위해 대신 희생할 거라는 암시를 주는 듯 하다. 결정적으로 - 주관적인 부분이지만 - 둘 다 곡 자체가 별로다(...). [본문으로]
  5. 대부분의 화면에서 작화 퀄리티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될 뿐더러, 가끔씩 볼 수 있는 액션 신들도 상당히 화려하다. 음악도 카와이 켄지. 기본적으로 [공각기동대] 스텝들이라 하니...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