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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10/2007

전뇌 코일 (電脳コイル - Coil a Circle of Children) [2007]

by 노바_j.5 2010. 12. 20.

대중적인 인기작품보다는, 상업적인 입김이 적고 스토리가 충실한, 소위 '숨겨진 명작' 부류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베스트애니메가 1주일이 넘게 다운된 상태인지라 자료는 부족하지만, 2007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일본애니에 있어서 상당히 풍성한 해였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2006년, 2008년에 비하면 더더욱 두드러지지 않을까.

[전뇌 코일]은 2007년의 숨겨진 명작들 중에서도 숨겨진 명작으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인데, 작품 초반의 몰입감 부족은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대신 그 전반적인 작품성 역시 그만큼이나 뛰어나다. 제작진 일부가 스튜디오 지브리 출신인 덕에 작품의 정서나 애니메이팅 기술(움직임) 등에 있어서 특유의 느낌도 많이 묻어나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태생이 '교육방송'이라는 데에 있다.

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의 세계

작품 내 세계관과 소재에서 가장 핵심적인 '증강현실'이란 요소는 지금 우리가 빠져 사는 가상현실(=인터넷)보다 한단계 더 나아간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파급력이나 중독성이 지금보다도 심해질 수 있는 반면, 현실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는 아이들에게 실제로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기도 한다.

또한 어린시절에 누구나 갖는 사후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여기에 절묘하게 엮어놓았는데, 특히 이 두 세계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보편적 일본 문화인 신사와 도리이(일주문), 횡단보도와 토오량세(通りゃんせ)를 사용한 것은 그야말로 적절하다. 특히 이런 것들이 전면적으로 부상하는 후반에 들어서는 보통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느끼기 힘든 소름과 전율을 수시로 체험할 수 있다. 때로는 심리적 공포로, 때로는 감동으로.


재미있는 점은 - 특히 교육방송임을 감안할 때 - 작품에서 굳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구분해서 아이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물에 신이 깃들어있다는 신토 사상의 영향이 크겠지만, 짐작컨데 한국에서 이런 설정의 작품이 나왔다면 '야 이것들아 꿈 깨고 빡센 현실에 몸부림쳐봐라 으허허허' 라는 식의 무시무시한 패러다임을 주입시키지 않았을까.


[전뇌 코일]은 꿈꾸는 아이들을 붙잡고 흔들어서 억지로 깨우는 대신, '이별'을 가르친다. 애완동물과, 할아버지와, 친구와, 예전에 살던 마을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유년기'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한,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같지만 다른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주인공 야사코(優子)와 이사코(勇子)는, 그런 아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따듯한 마음'과 '용기'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들

- 스토리 자체는 훌륭하지만 스토리텔링에는 2% 아쉬움이 남는다. 증강현실에 대한 생소함에 더불어,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아이들에 대한 충분한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생동감의 부족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밀들을 너무 꽁꽁 끌어안고 있다가 막판에 가서야 연달아 쏟아내는 모양새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새로운 개념이나 숨겨졌던 진실같은 것들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반전에 반전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혼란이 가중된다.

- 색감을 이렇게까지 탁하게 했어야 했는지는 조금 의문스럽다. 소리 질감도 전체적으로 앰비언스나 울림을 죽인, 굉장히 눌린 소리인데... 취향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꽤나 과한 느낌이다.

- 질감이나 전체적인 작품의 톤만 가지고선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전뇌의 저쪽세계'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후반에 가서는 [하이바네 연맹]이 강하게 연상된다. 우연의 일치인지, [하이바네 연맹]의 올드홈 멤버들도 상당수 성우진에 포함되어 있다. 굳이 따라했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 아마도 [전뇌 코일]처럼 정.기.신(精.氣.神) 내지는 영.혼.백(靈.魂.魄)의 구분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작품, 실제로는 상당히 심오한(?) 면이 있다. '의식'과 '기억'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라는 식의 의구심이라던가, 사람의 념(念)으로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가 등... 지금 생각해보면, 후반의 혼선은 여기에서 상당부분 빚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 정말로 보여주고 싶은 대상이 누구인지 좀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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