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6~2010/2007

기동전사 건담 OO (더블오) 시즌 1

by 노바_j.5 2012. 2. 6.


※본문의 '더블오'는 [기동전사 건담 OO] 1기에 한정합니다.

1979년 방영이 시작한 이래 [기동전사 건담]은 수많은 후속작과 배리에이션을 거듭하면서 선라이즈와 반다이의 플래그쉽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같은 우주의 연대상에서 시작한 후속작들은 이윽고 [기동전사 건담]이 정립한 '사실성'을 깨며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하고, 종종 다른 세계관으로도 뻗어나갔으며, 21세기에 들어서면서는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며 오리지널 건담의 '현대판' 리메이크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일일이 챙겨보지는 않았지만 이 더블오야말로 제대로 된 건담의 적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퀄리티
더블오의 두드러지는 장점 중 하나는 압도적인 퀄리티다. 거대 인간형 로봇의 시초라고 불리우는 철인28호조차 - 비교적 심플한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 제작비에 큰 제약을 받으며 사그라들어버렸다. 인간형 메카닉의 애니메이팅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주인공 기체인 '건담 엑시아'는 화려한 근접전을 컨셉으로 하는 로봇. 더블오는 작화의 품질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면서도 다이나믹한 연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퀄리티'는 작화에 한정된 것이 아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에서의 퀄리티다. 디자인, 각본, 음악, 연출, 성우 등 전 분야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의 컨셉으로 모여 훌륭한 통일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밸런스
퀄리티의 통일감에서 보듯, [기동전사 건담 OO]에서 가장 극찬할만한 요소는 바로 '균형'에 있다. 더블오는 근래의 어떤 건담보다도 UC세기 건담 작품들이 갖는 진지함과 사실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후세대 건담들에서 보여준 미형 캐릭터나 다양한 건담 배리에이션이라던지, 서비스 씬이나 떡밥놀이덕후자극 등의 현대적 / 상업적 요소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21세기 건담들이 과거 회귀를 외치면서 이 둘 사이의 함정에 빠진 것과는 대비된다. 더블오에는 [기동전사 Z건담]의 피가 진하게 흐르지만,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리메이크라 할 수는 없는 이유도 이런 긍정적인 포용력과 유연한 적용력 때문이다 (허나 추측컨데, 대놓고 오리지널 건담과 Z건담을 표방한 시드 시리즈보다는 이 쪽이 훨씬 더 다이렉트하게 Z건담과 연관될 것이다). 첨언하자면, 전반적으로 훌륭한 퀄리티와 더불어 성숙한 시각,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분위기나 모습 (서로간에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 과거에 얽매인 / 아웃사이더 / 해결사들)을 보면 [카우보이 비밥]이 강하게 연상된다.


[기동전사 건담 OO]의 인상적인 점들:

⊙ 전략전술의 묘와 두 마리의 토끼.

. 더블오의 화려한 액션 씬은 일품이지만, 모빌슈트들의 싸움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다. 더블오의 각본을 보면 굉장히... '문어체'라 해야할까? 서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전체적인 정국'과 각자의 셈을 헤아리는 전략전술적인 재미가 굉장히 크다. 스토리 진행의 근간이 되는 갈등과 재미 유발에 있어서 이런 요소를 더블오처럼 전면에 내세우는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다. 시뮬레이션RPG 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4기의 건담들은 확연한 성능의 우위를 점하고 있고, 대부분의 경우 전투원들은 전장의 말로써 충실히 움직이기에, 더블오의 전투에서의 성패는 이런 지략 싸움에 크게 달려있다. 별로 하는 일 없어보이는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의 비중이 큰 것은, 무려 '전술예보가'라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전략전술 싸움'이란 요소를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씬에는 전투씬대로 카타르시스를 모아준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MS 전투는 그 동안의 전략전술 싸움이 결실을 맺는 지점이며, 더불어 주인공들이 가진 압도적인 성능은 그 능력이 발현될 때 '거대로봇만화' 본연의 쾌감을 안겨준다.

  사실성 → 설득력.
. 인과관계와 행동에 설득력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각 조직의 수장들은 철저히 계산 하에 움직이고, 인물들은 상대적인 위치에 놓여있으며, 병사들은 조직의 규율에 따르며 말 역할에 충실한다. 가장 만화적인 주인공 집단, 즉 프톨레마이오스의 멤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전쟁의 폐해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정신줄이 간당간당한 수준까지 밀어붙여진 인물들이며, 또 그로 인해 더이상 기댈 곳이나 돌아갈 곳이 없는 (혹은 있어도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인물들의 과거는 충분히 공감대를 이룰 만큼 충격적이며 (심지어 사지 크로스로드 커플을 통해 25화 전편에 걸쳐서 아주 친절한 유사체험을 시켜준다(...)), 덕분에 그들의 극단적이고 만화적인 행동들도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패트릭 콜라사워나 트리니티 형제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범위(라고 치자).

  건담광
. "내가 건담이다"라는 희대의 개드립멘트를 날리는 주인공 세츠나 역시도 이야기가 나아가면서 정당화되는데, 제작진의 비범함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 세츠나 F. 세이에이라는 주인공 설정이다. 주인공이 건담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그 모습 자체가 로봇만화에 열광하는 덕후시청자층의 그것을, 그야말로 정확히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린 시절 아버지를 신처럼 인식하지만 이후 모종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로봇만화의 로봇에서 그 대체자적 존재를 느끼고, 또한 그런 이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며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세츠나의 모습에 투영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차용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아쉬운 점
이 모든 찬사에도 불구하고 본작에도 아쉬운 점들은 있다. 결정적으로는 마무리. 캐릭터들에게 각자의 스토리와 적대자를 만들어놓은 것은 좋은데, 진행을 그렇게 재미지게 해놓고 막판에 가서 한꺼번에 해결하려니 답이 안나온다. 특히 알레한드로 코너와의 대결로 세츠나가 모종의 결말을 얻어냈는대도 불구하고 그 뒤에 그라함 에이커가 들이닥쳐서 한판 더 한다는건 시나리오 구조상 주인공의 욕구를 불분명하게 만들어버린다는 큰 결함을 갖고 있다. 또한 알레한드로 코너는 코너대로 존재감이 부족하고, 그때까지의 진지한 분위기로 보아 막판에 사망한 듯 보이는 대다수 상대방들이 2기에 버젓이 살아나온다는 것이 몇 분 뒤에 바로 공개된다. 드라마틱 구성은 완전히 2쿨로 끝날 기세였는데 스토리라인은 반대로 가버리면서 이도저도 아닌 뭔가 묘한 끝맛이 남아버리는 것이다. 2기 스포일러를 줄이던지 애초에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단원스러운 연출을 피하던지 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리본즈의 막판 반전까지는 괜찮다.) 1기를 1기대로 끝나게 하던지 아니면 2기와 합쳐서 전체를 하나로 놓고 볼 것인지가 뚜렷했어야 하는데, 서로 상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애매한 점 ~ '아쉬운 점'에 비추어:
- 스토리텔링이 과하게 서술적이었던 것일까?
- 여러 입장에 선 다양한 인물들이, 마치 타임어택을 하듯 촉박하게 보여지는 전략전술적 재미. 그런데 모두의 이야기를 말끔하게 마무리지어줄 필요는 있는걸까 없는걸까? 물론 해주면 좋지만,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현실적인 작중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엔 특히... 실제의 만남과 이별 역시도 갑작스럽게 이뤄질 때가 많으니까.

기타
- 시대를 애매하게 앞서간 작품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창하게 앞섰다기 보단, 몇 년 정도...?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이후에 나왔으면 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 음악이 미친듯이 좋다고 생각했더니 카와이 켄지. 오오 카와이켄지 오오.
- 오프닝 - 어딘가 비극적이면서도 강렬한 음악. 절규하면서 궤도 엘리베이터를 따라 푸른 지구로 추락하는 세츠나/건담. 흩뿌려지는 빛... 정말 이 이미지 하나에 모든 것이 담겨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 고루고루 감안했을 때, 근래 본 애니메이션들 중에는 단연 최고였다.
 

p.s.
- 1기만 본 입장에서 간략하게 쓰려던 것이 불이 붙어버렸다잉여력폭발. 정성들여 병신인증을 한 것은 아닌지 2기 감상하면서 긴장 좀 타야 할 듯(...).

- 설마 마지막으로 본게 단쿠가 노바라서 내가 이러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