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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2011

코쿠리코 언덕에서

by 노바_j.5 2012. 9. 25.

지브리는 이미 아니메도 카툰도 아닌, 자신만의 스타일과 시장을 갖고 있는 독자적인 무언가로 자리잡은 듯 하다. 그 기술적, 스타일적 완성도가 얼마나 감탄스러운지, 아마 필자한테 코멘터리를 맡기면 러닝타임 내내 호들갑을 떨 수 있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은 개개의 장면들이나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곧이곧대로 읽혀지는 것이 보통인데,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섬세한 묘사가 너무 풍성하게 화면을 메꾸고 있다보니 행간들의 미묘한 의미 파악에 차질이 있을 정도이다. 이 정도의 퀄리티라면 거의 어처구니 없는 수준.


이 작품에서 미야자키 고로와 지브리 스탭들은 상당히 중용적인 스탠스를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초반의 왁자지껄한 이벤트나 "카르티에 라탱"의 존재 양식은 고스란히 기존 지브리의 그것이며, 작품 자체적으로도 「귀를 기울이면」과 「바다가 들린다」등 예전 작품들과 닮은 구석이 꽤 있다[각주:1]. 그러나 상기 작품들의 현실적 분위기와 사랑, 낭만을 1963년이란 시대적 배경에 담은 점이나, 연출에서 오는 차이 등은 『코쿠리코 언덕에서』에게 자신만의 분명한 오리지널리티를 확보시켜 준다.


사실 「귀를 기울이면」과 「바다가 들린다」 역시도 기존 지브리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이질적인 작품들이며, 감독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다. 요컨대 친숙한 듯 친숙하지 않은 듯한 경계를 잘 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여파를 세계 2차대전이 아니라 한국전쟁(6.25)에서 가져오는 것 역시도 이런 묘한 느낌을 주는데, 관객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았나 싶다. 작품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아직은 미숙한 미야자키 고로 감독을 여러모로 배려한 처사 아닐까.



이렇게 작품이 감독을 보좌해준다는 느낌으로 볼 때, 아직은 감독의 역량이 지브리의 기술적 완성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인상은 분명히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고로 감독이 아무래도 감상주의적인 경향을 내보인다는 점인데, 이전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다른 감독들이 지휘를 맡았을 때에도 통속적인 '아니메스러운' 느낌은 최대한 지양했다는 점에서 보면 조심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경우 주인공 우미의 꿈 장면에선 '에에이 이건 아니지' 싶은 기분도 들고, 「Read Or Die」의 히로인인 요미코 리드먼이 연상되는 히로 언니의 경우 예전 지브리에서 보지 못했던 유형이면서도 대단히 현대적인 캐릭터라 굉장히 인상적이었으며 내가 요미코 빠돌이라는 건 비밀, 고로 감독의 관조적인 시선에서 오는 듯한 '언덕길'에 대한 시각 차이는 상당히 마음에 든다. 「게드 전기」예고편에서도 큰 계단길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러나 그 반면에, 캐릭터들의 사적인 영역에 포커스를 들이대는 부분은 아무래도 염려스럽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그나마 그런 부분들이 잘 맞아떨어지고, 앞서 얘기했듯 작품의 나머지 부분들이 감독을 최대한 보필해 준다는 느낌이라 다행스럽지만, 고로 감독의 부족한 경력을 생각하면 향후 불안요소로 남지 않을까[각주:2].



1963년의 일본은 아직 전쟁의 영향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긍정적인 활력이 퍼져있던 나라였고, 코앞에 다가온 동경 올림픽에 힘입어 한층 더 설레임이 있었던, 낭만의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작품이 꾸준히 보여주는 풍성함과 정겨움, 여유있는 템포와 장면 묘사 등을 보면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낭만'에서 나아가 '힐링'에 상당한 초점을 둔 작품으로 느껴진다. 시대적 느낌을 충실히 살리면서도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질감을 보여주는 사운드트랙과 음향 역시 괄목할만 하며, TV 아침드라마 같은 (심지어 꽤 허술한) 스토리상 핵심 요소는 작품의 시대배경이나 원작의 발매연도(1980년) 등, 작품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감안하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다. 독특한 것은 엔딩인데, 스토리 상으로는 분명 말끔한 해피 엔딩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쓸쓸하고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다. 작품 전반에 스며든 시대적 아픔을 일본 특유의 음울한 미학[각주:3]으로 그려냄과 동시에, 과거의 향수에 젖는 듯한 그리움의 정서를 함께 집어넣었다고 볼 수 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단순히 찝찝함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1. 귀를 기울이면: 전원적인 배경의 풋풋한 사랑과 남자주인공의 의지 관철. 바다가 들린다: 바닷가 마을의 학원연애, 상경길에 결정적인 전환점 맞이. [본문으로]
  2. 이런 건 아무래도 계속 만들고 깨지고 하면서 다듬어지는 부분인지라... [본문으로]
  3. 작중 합창 등의 가사, 멜로디를 보아도 이런 면모가 한껏 드러난다. 희망찬 노래인데도 어둠과 불길함이 공존하는 느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