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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2011

치하야후루 (ちはやふる)

by 노바_j.5 2013. 3. 5.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초중반까지 이 작품을 보면서 든 느낌은 딱 "병X같지만 멋있어..."였다. 경기 카루타라는 생소한 카드놀이를 이렇게까지 진지빠는 스포츠로 승화시키다니! 약간은 어처구니 없는 듯한 실소를, 보면서 얼마나 지었는지 모르겠다. 경기 카루타라는 분야가 일본에 엄연히 존재하고 그 형식이나 격식이 실제로 비슷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쓸데없는 데에서 폼 잡는 일본 만화의 특성이 '경기 카루타의 생소함' + '섬세한 여성적 묘사력' 이란 더블 버프를 받아서 굉장히 오글거렸다.


경기 카루타가 가지고 있는 위상이나 규모 등을 보면 이것이 일본 내에서도 적당히 마이너한 영역이라는 느낌이다. 즉 널리 알려져있지만, 최고가 되더라도 수익을 창출해서 업으로 삼기에는 힘들 수준의 분야라는 것인데, 이 지점이 재미있다. 적어도 한국에서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치하야후루』에서처럼 생업 밖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이니 말이다. 그마저도 경기 카루타처럼 전국적, 사회적인 인지도가 있고 티비에라도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려나. 예컨데 음악은 범 인류적으로 보편적인 문화이지만, 인디 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유재하 경연대회등 유수의 전통있는 경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반 대중은 전혀 접할 일도, 그렇다할 관심도 없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한국의 음악적 중심은 이미 지상파에서 멀어진지 오래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요근래 대형자본이 투입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수년간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대도 불구하고, 아직 관심을 받고 있는 묘한 현실. 창출해내는 쪽이든 받아들이는 쪽이든, 무언가를 깊이있게 즐기기에는 모두들 너무나 피곤해져버린 듯 하다.


작품 자체로 돌아가자면 『치하야후루』 최대의 장점은 여성작가 관점에서의 접근과 열혈스포츠물이라는 독특한 접합에서 훌륭한 시너지 효과를 끌어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허당 미녀' 는 두말할 것도 없고 '현실적으로 이기적인 남자 주인공' 컨셉도 순정물에서는 흔한 컨셉의 캐릭터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들이 큰 틀에서는 학원스포츠물스러운 이야기에 들어오면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서 '신의 한수'라고 찍을 수 있는 것은 미시마 타이치의 존재다. 얼핏 보면 주인공들의 삼각구도에서는 가장 나약해보이는 포지션에 서 있지만, 실제로는 승부나 노력, 꿈과 삶, 자아성찰 등,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섬세한 결로 보여준다. 미시마 타이치란 캐릭터 하나가 있음으로 인해서 『치하야후루』는 그 이야기와 독자층의 스펙트럼을 두배 이상으로 넓히고 붙들 수 있게 된다. 여성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이점이 최대한 발휘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