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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2014

알드노아. 제로 (ALDNOAH. ZERO)

by 노바_j.5 2017. 8. 31.

너무 많은 레퍼런스 사이의 균열

한동안 애니메이션 감상을 못했던 것을 감안해도, 간만의 메이저 작품이었던 것 같다. 엔딩을 보고 나니 다들 아름다운 추억(...)이 한가득일 거 같지만, 폭발적인 분량과 분노의 나무위키 글들을 읽는것 또한 재미있었고... 다행히 보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부분들은 많이 겹치지 않는 것 같아 마음 편히 감상평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시원시원하다! 웰메이드 작품

처음 시청하면서 바로 들었던 생각은, 소위 '왕도'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현대적인 차용이 매력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시원시원한 전개가 좋다는 점. 

워낙에 '왕도'를 내세웠기 때문인지, 레퍼런스 / 클리셰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다. 부모가 없는 재능있는 소년이 우연하게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던가, 우주거주민과 지구인 전쟁의 이유라던가, 턴에이 건담의 김 깅가남이 연상되는 궤도기사들이라던가.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지'를 발휘해 적을 이겨나간다는 것인데, 의외로 이 점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만화를 보면서 아이들이 흠뻑 빠지게 되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라는, 그런 상상력이나 발상의 참신함. '나루토' 이후에 이런 요소가 이렇게까지 전면적으로 나온 경우는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물며 '알드노아. 제로'의 경우 고전적인 만화의 요소인 '과학정보'까지 곁들여졌으니...

두번째로 들었던 생각은 '아니 오리지널 작품이 뭘 믿고 이 정도 스케일 / 예산이 들어갔지?!' 였는데, 참여스탭들의 전작이 '마마마(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Fate/Zero' 등이었다는 것을 알고 바로 납득(...).

참으로 웰메이드 작품이고, 상기하였듯 다양한 레퍼런스를 비롯해서 이 작품에 집약되어있는 요소나 정보량은 정말 많다. 치밀한 세계관도 그렇고, 예를 들면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는 '공주와 기사' 라는 캐릭터성을, 모두가 납득하고 좋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잘 차용해놓았다. 옛 향수 뿐만이 아니라 30세 전후의 캐릭터들이나 현실세계의 사회적인 분위기도 묻어나도록 하며 중장년 팬들도 놓치지 않았다. 단순히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닌, 여성들의 시각도 채워줄만한 로맨스나 심리묘사. 동인녀들의 불타는 사랑을 받을만한,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와 라인하르트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듯한 남주 커플링. 여러 층에서 사랑받을만한 온갖 요소들을 정말 꾸역꾸역 채워놓았고, 거기에 거대 자본이 투입되었다. 대기업이 심혈을 기울여, 시장을 제패하려고 만든 대표상품 (이를테면 삼성이나 애플의 대표 스마트폰이라던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만들면 문제가 뭐지?'

크, 크, 크, 크....

사실 작품을 보는 내내 크게 흠이 될 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화성의 황제가 저 정도 인품이나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라던가, 주인공의 과한 무적보정이나 준 사이코패스스러운 성격 같은, 작은 구멍(?)들이 있긴 하지만, 감상을 방해할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재미있다. 잘 팔리게 생겼다. 그래서 도중에 잠정적으로 내렸던 결론은 '완성도 높게 잘 만든 상업작품이지만, 제작자가 무얼 말하고 의도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작가주의적 의식이나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정도였다. 한가지 추가하자면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가 있어서, 뭔가 정체성이 느슨해보인다는 점 정도.

그랬는데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마지막 화가(.....)

넘치는 자원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다 하고, 온갖 것들을 다 가지고 싶었던 것에 대한 반작용은 아쉽게도 마지막에 터져버렸다. 헛웃음과 함께 육성으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바 이건 아니잖아!;;;"라는 말이 터져나왔는데, 아마 나같은 시청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거의 다였겠지.

이런 식의 '거대 상업작품'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알드노아. 제로' 정도라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과하게 오타쿠 층에만 기대거나 자기복제에 머무르지 않고, 애니메이션이 주는 본연의 재미와 매력을 충실히 살린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이 주는 교육적인 측면까지도 - 단순 과학정보같은 차원이 아니라, 예를 들면 한국의 드라마들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남녀관계나 '공주'라는 인물상에 대한 묘사 등 - 포함해, 생각해볼 건덕지가 많았다. 뭐, 좋다 나쁘다 하기보다는, 결국 애니메이션 보고 자란 사람들끼리는 그 층의 사람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인격이 형성되겠거니 싶지만.

다양한 요소들을 혼합시키면서 훌륭한 밸런스를 찾는다는 것은 과연 어렵다. 살면서 A와 B라는 목표를 다 붙잡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퓨전요리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도저도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무심코 생각이 들었다.

'원초적인 재미'로 돌아가보면, 애니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한테 "야 이거 한번 봐봐, 진짜 재밌어"라고 권해주는 데에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가? 메카물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알드노아. 제로'는 더욱 안타깝다. 비록 흥행에 실패한 것은 아니라지만 작품적으로도 8부, 9부 능선을 넘어갔는데... 엔딩 때문에 추천해주지 않기가 너무 아까운 작품이다. 굳이 같은 제작사가 아니더라도, 메카물이 아니더라도, 마무리까지 한층 더 완성도 높은, 진짜 '웰메이드 상업작품'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