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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5/2003

Wolf's Rain

by 노바_j.5 2007.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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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소개
울프스 레인은 카우보이 비밥의 크리에이터들이 다시 집결해 만든 작품이라고 해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오랜동안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DVD를 구입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약 5개월 이상이나 제대로 아니메를 감상하지 않았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부족했습니다만, 적어도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정상 밤에 못 보아서 아쉽다는 생각도 드네요.

울프스 레인은 - 단지 제작진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 어쩐지 비밥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특히 극후반의 오프닝/엔딩 처리를 보면 확신이 들고... 거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감독인 '오카무라 텐사이'의 존재입니다. 주인공이 늑대들이라는 점도 많은 차이점을 불러옵니다만, 약간 생소한 이름인 오카무라 텐사이는 나머지 화려한 스탭진을 제대로 이끌어어나갈만한 역량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토리를 제대로 풀어나가는 능력이나 화면연출 면에서 부족하다거나 진부한, 단조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굉장히 안타까운 점인데, 칸노 요코의 음악이나, 극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작화를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특히 작화의 경우, 지금까지 본 것들 중 최고로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단 한 편도 무너지지 않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비교적 섬세한 그림체와 상당한 애니메이팅을 유지하면서 이루어 낸 것이라 더욱 그러합니다.

리뷰
일본에서 늑대라는 생물은 독특한 위치를 점합니다. 오오카미(늑대)라는 이름은 대신(大神)과 같은 발음이기도 한데, 실제 일본의 야생에서는 늑대가 약육강식의 최정점에 올라가 있었다고 하죠. 일본의 최고신인 아마테라스도 풀네임이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입니다. (그런 주제에 늑대를 1905년에 멸종시키고, 한국늑대도 씨를 말리다니-_-) 우리나라에서도 특별한 생물로 여겨졌긴 했습니다만 영물보다는 요물에 가까운 느낌이죠. 사람을 현혹시킨다는 점에서는 어느정도 비슷한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늑대가 자연의 대리인이나 신의 사자라는 생각이 없다고 해도, 울프스 레인의 늑대들 - 정확히 말하면 키바 - 는 그 고독함과 높은 긍지,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거침없는 태도 등으로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현대 사회에서 잃어가는 사람의 야성, 본성같은 것으로 느껴지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이 의미도 더욱 커져서 순수함과 자연, 순리라는 하나의 큰 테마로 이어지더군요.

서기 2000년 전후로 아니메계에는 존재와 운명이라는 것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울프스 레인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쉽게 말하면 '윤회', 즉 '인간의 탐욕과 이기로 멸망하고 재탄생하는 세계와 윤회하는 영혼/인연' 입니다. 사실, 울프스 레인의 첫 구상이 비밥을 제작하던 당시였다고 해도, 2003년에 나오기에는 너무 뒤늦지 않았나 하는 감이 없지않죠. 이런 식의 이야기는 에반게리온, 빅오, 라제폰 등을 통해 수없이 많이 이야기되고, 또 그것들이 이미 적던 많던 성공을 거둔 - 즉 이미 널리 알려진 -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울프스 레인은 세기말의 감상을 담은 다른 작품들과 스스로를 차별화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철저한 자연/야생으로의 회귀'입니다. 초월자가 거대로봇이 아닌 자연의 늑대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울프스 레인에 현대인을 반영하는 것은 주요인물이 아니라, 야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인간이 만든 틀 안에서만 생활하는 쟈가라 돔의 시민들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인간형으로 나오는 허브 역시, 쉐르와의 관계에서 '첫눈에 반한' 본능적인 사랑이 원동력이고, 쟈가라/다르시아/쿠엔트 등 모두는 파멸 등의 생각에 사로잡혀 극단적이거나 집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이성'이나 맑은 직관력/통찰력 등을 대변하는 주 요소나 인물은 늑대들 이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늑대 중에서도 선택받은 주인공, 키바 역시 그 본능적인 면모나 '순수성'이 두드러지지요.

여기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작중의 늑대들은 인물화되어도 어디까지나 그 본성은 늑대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손으로 무엇을 한다는 (예를 들면 움켜쥔다던가, 들던가) 행동도 극히 드물고, 내적으로도 유대감이 있기는 해도, 생각이나 감정표현이 드물고, 서로 흩어지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 역시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기 때문에 보는 이는 '누가 누구랑 만난 적이 있던가' 하면서 갸웃할 때가 많지요. 우리가 보는 것은 '초인'이 아니라 '인간모습의 늑대'로 남습니다. 저는 사람이 본능을 초월하는 이성이 있어서 위대하다기보다는, 본능을 이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서 위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생물 특유의 본능이나 감각 같은 것을 중요시하는 편이고, 실제로 그런 것들을 주의깊게 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맥락에서는 공감하지만, 한 작품 안에서 '순수함'이나 '본능'이라는 것에 과하게 기대는 것은 무리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어딘가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느낌 중 일부는 그런 '보편적인 인간성의 부재'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나 더 실질적인 문제는 스토리텔링의 문제입니다. 연출의 문제인지 각본의 문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블루같은 경우 캐릭터가 완전하게 서 있지 못하고 약간 겉돌거나 허공에 떠있는 모양이 됩니다. 어물쩍 다뤄진 (그리고 동물적인) 블루-히게의 이어짐이나, 키바와 체자의 사랑이 보통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어떤 초월적이고 본능적인 이끌림이라고 볼 때,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요소는 울프스 레인에서 거의 배척되었다고 보아도 무관할 것이며 오히려 주인공측의 반대편에서 파멸이나 비극을 낳는 씨앗이 됩니다.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대중적 요소를 배제하려면 탄탄한 이야기가 뒷받침해줘야 하는데, 스토리상 집중할 곳에 집중하느라 모든 것을 밝히지 않은 것은 좋지만, 설명이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너무 전형적인 상황설정을 가져다 쓴다는 것은 진부함을 불러와버립니다(특히 쟈가라). 다르시아 등의 이야기도 너무 대사/나레이션 등의 '말'로만 때워진 기색이 역력하고... 위치가 어정쩡한 쿠엔트 이야기에 비중을 줄이고, 나머지를 보강하는데 쓰였으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역으로 작가 입장에서는 '얘네 이야기는 좀 뻔하니까 중점에나 신경쓰자'라는 취지였을 수도 있지만요.

주 이야기에 관해서 재미있게 본 것은, 귀족이라는 '인간상의 극단까지 간' 존재가 가면 등의 치장으로 자신의 '참된/순수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쟈가라가 주로 추는 빙글빙글 춤(?) 역시 꽃(체자)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 - 본질적 동질감, 그리고 이해심의 부재 등을 보여주지요. 체자같은 경우도, 제가 보기에 인간은 파멸을 두려워하여 늑대와 달의 꽃을 동시에 없애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결정체'라는 의미가 있지만 체자가 꼭 체자일 필요는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지요. 하지만 그런 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자 이제는 그 마지막 남은 결정체인 체자를 빼앗으려 서로 싸웁니다.

마지막의 다르시아 눈깔 효과(...)는 이상적인 낙원이 지상에 존재하지 못하고, 악 역시 다툼 끝에 유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이 단지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늑대 그 자신이 인간이 되기도 했다는 이야기 역시 생각할 바를 남겨줍니다.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에서 나아가 인간 안에 다른 생물이 갖지 못한 조물주적 권위와 신성함이 깃들어있다는 이야기를 동시에 하기 때문입니다. 늑대로 대변되는 자연이나 다른 생물을 같이 소중히 여길 것, 또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함께 숨어있는 스스로의 신성함을 깨우칠 것을, 울프스 레인은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아마 다르시아/쟈가라 등의 상대역을 다루는 비중을 극도로 낮춘 이유는 그만큼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범적(?) 모습에 비중을 두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복잡한 관계설명이나, 인간이 아닌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시키기가 어려워서 그런것일 수도 있지만 -ㅅ-)

작중에서 몇번이고 되풀이되는 '눈을 뜨고 똑바로 봐!'라는 외침이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울프스 레인은 단지 동떨어진 세상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우리에게 -작품 전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호소하기도 하는 미덕을 갖추었습니다. 불안을 통해 발견한, 아직 남아있는 희망. 이것이 2000년을 통과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의 차별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외

음악
음악의 경우, 사실 개인적으로 칸노 요코는 마크로스 플러스, 카우보이 비밥, 에스카플로네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약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칸노 여사 본인의 문제인가하고 생각도 했습니다. 울프스 레인의 경우 왠지 모르게 에스카플로네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한 느낌을 주는데, 칸노 요코 특유의 다양한 음악폭(?)을 생각해봤을 때 꽤 의외입니다만, 사실 에스카플로네와 울프스 레인이라는 작품들 자체가 알게모르게 닮아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항상 평균 이상은 해주는 뮤지션이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연출력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너무 정석적으로 '이럴 때는 이런 음악'이라는 식으로 팍팍 나온달까요.

작화
작화를 다시 얘기하자면, 솔직히 도중에 '작화를 아끼려고 했나' 하는 씬들이 꽤 있습니다. 다르게 연출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제작비 절감과 퀄리티 유지를 위해서, 약간 어중간해도 전체를 한 씬에 담을 수 있는 그런 연출들이... 단, 액션 신에서는 아낌없이 팍팍 밀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실험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순간 순간의 화려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26화 -> 30화
울프스 레인이 괜시리 비밥을 연상시키는 이유 중의 또 하나는 높은 퀄리티와 더불은 제작 도중의 난항입니다. 비밥의 경우 잠시 방영을 멈췄던 걸로 알고 있는데, 울프스 레인의 경우는 중간의 4화를 통째로(!) 회고편으로 때우는, 도가 지나친 상쾌함을 보여줍니다.
일어더빙
목소리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초반부터 반가운 목소리들이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이시즈카 운쇼(비밥 등), 미야모토 미츠루(빅오), 스야마 아키오(지금, 거기에 있는 나) 등... 사카모토 마야같은 경우는 예상을 못했는데 문득 크레딧에서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쟈가라경의 목소리는 또 따로 있더군요. 부분부분, 둘이 번갈아서 맡은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보통 성스럽다거나 순수하고 맑은 이미지라고는 해도 수수한 동양적인 모습이었지, 서구적인 덩어리감(...)이 느껴지는 캐릭터는 지금껏 하는걸 보지 못해서,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외에 오오츠카 아키오, 와카모토 노리오 등도 중간중간에 나와서 좋았구요 (오오츠카 아키오 같은 경우 이런 식의 부분출연이 굉장히 많은 듯?), 조금 놀란 것이 토오보에역의 목소리입니다. 카운터테너같은 것인지... 체구가 굉장히 작은 분들에게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 키바 역의 미야노 마모루 목소리가 참 적합했다고 생각하고...

한국어더빙
사실 무엇보다, 한국어 더빙이 괜찮았다고 생각되는데... 제가 본 DVD 중 아마도 유일하게 한국어더빙 시 배경음이 죽거나 목소리가 크거나 하는 문제가 없고 일어더빙과 비슷한 수준의 음성 크기가 유지되더군요. 연기들이나 배역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그다지 많이 듣지 않아서 뭐라고 하기까지는 그렇지만, 오리지널보다 좋다고 느껴질 정도로 확 와닿았던 것은 쿠엔트 역의 시영준씨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뿌뿌뽕의 그분입니다(...). 몇몇은 과도한 캐릭터 연기에서 좀 더 벗어났으면 하지만 이것도 많이 좋아진 편인듯 하고... 히게 역은, 본편 셔플을 보면 '(일어판에서는) 일부러 배역에 안어울릴 목소리로 넣었다'고 하는데, 한국어더빙에서는 목소리 톤이 많이 다릅니다(대신 주인공 무리의 목소리가 다들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은 듭니다).

번역
자막은 오타는 거의 없었지만 역시 아쉬웠습니다. 가끔씩, 순간적으로 이야기흐름이나 미묘한 감정전달 등에 어긋나는 것은 이해할 만한 범위입니다만... 블루가 쿠엔트를 부를 때 '아버지'나 '아빠'로 하지 않은 것이, 큰 시점에서는 가장 아쉽습니다(이건 후반부에 가서 번역자가 아차 했을것임). 오히려 잠깐씩 체크한 바로는 한국어더빙 시의 번역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도중 허브의 "젠장할! 젠장맞으으으을~~~!!" 이런건 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단순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DVD의 가장 큰 잇점 중의 하나가 자막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역으로 이것 때문에 몰입이나 감정이입에 좀 손해를 본 느낌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막을 끄고 한국어로 감상했으면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