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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5/2004

공각기동대 2: INNOCENCE

by 노바_j.5 2011. 2. 6.
"고독 속을 걸으며
악을 행하지 않고
홀로 걸어가는
숲 속의 코끼리처럼"...

[이노센스]의 수많은 철학적 알레고리 중에서도 가장 힘이 실리는 이 문구는 [법구경]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역시 [법구경]의 글귀로 널리 알려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상당히 비슷하다.)

5년이 넘도록 볼 생각이 없었던 [이노센스]를 보게 된 것은 OST의 실황 연주에 너무나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나, 보고 난 뒤에는 상당히 놀라고 말았다. 이 작품은 내가 보아온 숱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작품들 중에서도 첫손에 꼽을만한 명작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 이유는 그 깔끔함에 있다. 여타 오시이 마모루 작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구질구질함이 없다고나 할까. "나는 누구인가"에서 비롯되는 실존의 정체에 대한 문제제기나 전뇌의 세계관은 이전과도 동일하기에 [공각기동대(1995)]의 파격이나 참신함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여타 작품들에서 곧잘 보이는 퇴폐적 회의(懷疑)나 말장난 보다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치열한 고뇌,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노센스]에서 특기할만한 점, 그리고 이 작품이 깔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나'와 '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불교적 사상으로의 귀결에 있다. 예컨데 [이노센스]는 중복과 반복이 대단히 많은 작품이다. 수 년 전 쿠사나기 소령이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바토, 전작에서 고스란히 차용된 여러 장면들, 작품 내에서도 되풀이되는 세계, 인형과 겹쳐지는 쿠사나기 소령(+2501)의 모습 등. 작품에 등장하는 철학적 문구들 역시 장광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사실 그 문구들이 엮여져서 가리키는 지점은 하나다: 자아 그 자체가 허상을 만들어내고, '나'를 의식할수록 그 존재의 순수성이나 충실함은 훼손된다는 것이다. '나'라는 자의식과잉의 극단을 보여주는 인물인 "김"은 자아라는 허상의 영원을 얻기 위해 자기 안으로 매몰되었고, 반대편의 쿠사나기 모토코는 다음의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나'를 버렸다. '코끼리'로 비유되는 깨달은 자, 야훼처럼 전능하며 네트워크 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초월의 경지에 오른 소령의 일부-성령의 현신-은 이야기한다. "지금의 내게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소령은 인형들의 희생 역시 동등한 생명체의 희생으로 간주하며 소녀에게 호통치는 바토의 고뇌 앞에서 간편한 해답을 던져주지는 않는다. 오로지 '행(行)'할 뿐이다. 

사랑과 영혼도 디지털로 치환되는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생명의 유전과 불교의 윤회는 반복과 복제의 형태로 나타난다.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절제된 연출과 대비되는 강렬한 배경음악은 외적 고요함 가운데에서 치열한 고뇌와 싸우는 정중동(靜中動)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하며, 이 작품의 제목인 [INNOCENCE] 역시 기존의 우리 언어와 일본어에서 단순히 표방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 - '죄/악 없는 상태'. '순수'. '선(善)' 등을 복합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바토가 걷는 구도의 길에 선문답을 던져주는 할러웨이 박사는 '자아가 생겨나기 이전의 어린아이는 인간이 아니며 카오스의 상태' 라고 이야기하지만, 반대의 측면에서 보면 그 어린아이야말로 바로 순수하며 충실한 존재(= innocence)인 것이다. 

할러웨이가 말하는 '인간'이란 즉 '자아/자기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뜻한다. 고스트를 통해 인형 역시 자의식을 갖추게 된다면 더이상 이런 '인간'의 구분법이 의미가 없어지고, '자아'란 곧 '허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의 정신/의식을 한 꺼풀씩 벗겨내어 인형에게 씌워주는 "고스트 더빙"은 바로 [이노센스]의 핵심이자, 오시이 감독의 지난한 고뇌의 결정체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고스트 더빙의 모체가 '어린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는 - 정말 너무나 어린아이다운 모습으로 - 외친다. "난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 그리고 그 앞에 선 바토와 소령은 입을 다문다. "나는 인간인가 인형인가"란 의문에 시달렸던 그들의 모습과, 그 앞에 선 순수의 존재-어린아이, 그리고 정신을 이식받는 순간 개별 존재로서의 존엄성은 얻었지만, 자신의 자아는 갖지 못한 채 희생당한 인형들이 교차한다. 아이가 거침없이 싫다고 외치듯, 스스로 원치않는 인간의 정신을 깎아내어 인형에게 씌워주는 것은 명백한 악(惡)이다. 그러나 이미 정신이 입혀진 인형들은 과연 그 존재 자체가 악이고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인가.

앞서 할러웨이 박사가 던지는 또 한가지 의미심장한 말은 어린아이나 데카르트가 인형을 이미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 즉 사람이 특정한 상(像)을 짓고 인지하는 순간 그 존재가 거기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상은 결국 허상이라는 말과 동시에, 사람이 사람으로 있기 위해선 서로를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의 중의어이기도 하다. (바토의 대사: "자신이 살았다는 증거를 찾는 길은 고스트의 수만큼 많아.")

기르는 개를 보듬어주는 손. 영양이 좀 부족하더라도, 좀 더 음식다운 음식을 챙겨주는 배려. 힘없는 아이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죽어간 인형들을 향해 베푸는 자비심... 언젠가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이 서 있었던 자리에 선 바토는, 그녀처럼 초월적 존재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김"처럼 자아에 매달리지도 않고,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인간임을 입증하는 제 3의 답에 도달했다: 현실 속의 구원자,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토는 아마도 계속 그렇게 남을 것이다. 로맨티스트인 그가 소령에 대한 마음을 디지털화 하지는 못할 테니까.

새로운 해답을 마련하고, 새로운 성찰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인 [이노센스]는 통상적인 '속편'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품에 "공각기동대 2"라는 제목을 빼고 곧잘 "이노센스"라는 제목만 표기하는 것 역시 그런 차원에서일 것이다. 자신이 기르던 개가 감화를 준 것일까? 오시이 마모루는 내가 그를 가장 어둡게 보았던 시기에 가장 밝은 깨달음을 이룬 듯 하고, 평소 오시이 마모루의 모습이 "김"처럼 느껴졌다면, 적어도 이번 작품에서의 그는 바토와 같이 느껴진다. [이노센스]에서 보여준 깨달음과 변환에 힘입어서인지 한동안 무언가 새로 만들 의욕/충동이 생기지 않았다던 오시이 마모루는, 4년만의 복귀작 [스카이 크롤러]에서는 살짝 희망을 심어놓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p.s.
카와이 켄지의 배경음악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멜로디는 음악에 속하지만 리듬은 인간에 속한다'고 했던가... [이노센스]는 여러면으로 분명한 '진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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