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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10/2010

일루셔니스트 (L'illusionniste)

by 노바_j.5 2012. 6. 26.


'벨리빌의 세쌍둥이'로 유명한 실뱅 쇼메의 2010년 작.


거장 자크 타티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자크 타티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으로 유명하며, 비록 남긴 작품들은 많지 않지만 영화사나 영화팬들 사이에서 거장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일루셔니스트'의 스크립트는 원래 딸한테 보내는 편지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벨리빌의 세쌍둥이'로 깐느에 간 실뱅 쇼메가 자크 타티의 딸인 소피 타티셰프에게서 건네받은 원작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아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화려한 수상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루셔니스트는 평론가들에게 굉장한 평가를 받았고, 많은 대중에게서도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이라는 포맷 자체의 예술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비주얼은 그 자체만으로도 '먹고 들어갈' 수 있을만큼 감격적인 화면을 선사한다.[각주:1][각주:2] 실뱅 쇼메는 원작과 다른 배경무대를 선택한 것에 대해 시각화의 잇점을 고려했다고 하는데,[각주:3] 작품을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하다.


작가주의적인 이 작품의 스토리는 굉장히 애잔하고 씁쓸하다. 마술사를 마법사로, 즉 정말 요술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믿은 시골의 순진한 소녀가, 시대의 뒷배경으로 사라지던 늙은 마술사를 따라나서면서 화려한 도시에 물들고, 비싼 옷가지 등을 노마술사에게 사달라고 보채면 노마술사는 소녀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남몰래 고역을 하며 그녀에게 세련된 옷과 구두를 사다 주지만, 근처의 젊은 도시남성과 사랑에 빠진 소녀를 보고선 마술 소품들을 정리하고 조용히 어딘가로 떠나간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화려했을 날들을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마술사와, 그 품에서 세상을 알아가며 소녀에서 숙녀가 되어, 이윽고 자립하는 여자아이를 통해 '일루셔니스트'는 시대의 교차점과 세대간 대물림의 과정을 보여준다.


치명적인 단점

그러나 이런 멋진 스토리와 아트웍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중대한 결함을 갖고 있다. 노마술사가 생면부지의 여자아이한테 이렇게까지 애정과 헌신을 베푸는 행동에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모습'이 이 작품의 주요한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작품만을 보면 키워서 잡아먹을(...) 심산으로 대해주다가, 다른 남자가 생기니까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의 서정성과 애잔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묘한 이질감이 생겨난다. '자크 타티', '윌로씨', '딸한테 보내는 편지' 등의 작품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남들에게 알리고 싶고 찬사를 보내고 싶은 작품일지 모르겠지만 그냥 작품만을 두고 보았을 때에는 그들의 환호가 마치 평론가의 거드름마냥 다가오는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뭔가 아구가 안맞는다... 도대체 왜?


뒤틀림, 진실게임.

'일루셔니스트'의 상영 직전인 2010년 5월, 평론계의 본좌인 로저 에버트 옹에게 투고의 글이 하나 던져진다. 자크 타티의 유일한 직계후손 가족의 한 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리처드 맥도날드 (Richard Tatischeff Schiel McDonald) 가 쓴 이 장문의 글은 상당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는데,[각주:4] 이 글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 '일루셔니스트'의 원작, 즉 편지는 실뱅 쇼메의 애니메이션에서 언급되는 둘째딸 소피가 아닌, 자신의 어머니인 헬가(Helga)에게 바쳐진 편지였다.

⊙ 자크 타티는 처음 극단에서 헬가의 어머니인 헤르타 (Herta Schiel)과 열애하며 임신에 이르게 하였으나, 수완있는 사업가였던 타티의 친누이 나탈리의 조언에 따라 친부로서의 의무를 포기하고 대금을 지불했으며, 이후 1955년, 반프랑스 폭동과 그에 따른 진압으로 아비규환이었던 마라케치에서 편지로 구조 지원을 부탁한 헬가의 요청을 외면하고, 대신 '일루셔니스트'의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 원작 '일루셔니스트'의 이야기는 당시 자크 타티의 열악한 상황과, 그런 와중에 잘 알지 못하는 사춘기 소녀를 도시로 데려와 겪게 될 딜레마, 극화적 페르소나 너머의 진정한 자신이 발가벗겨질 때 아이의 사랑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이 더 강하게 드러나 있다. ⊙ 리처드 맥도날드 본인이 이미 실뱅 쇼메의 '일루셔니스트' 제작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이런 가족사 이야기를 전했으나 자신의 친어머니인 헬가에 대해 언급 한번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과, 원작의 예술성과 그 본질적 의미는 무시하고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크 타티의 오마쥬성 작품을 만든 실뱅 쇼메에 대한 분노 표출.

⊙ 실뱅 쇼메는 자크 타티의 둘째 딸인 소피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으며, '일루셔니스트'의 영화화를 어떻게 허락받았는지에 대한 실뱅 쇼메의 이야기에는 다분히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


등이다.[각주:5] 맥도날드의 어조는 격식을 지킴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격한 감정이 표출되어 있는데, 그의 증언들이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후 실뱅 쇼메의 인터뷰에 따르면 실뱅 쇼메는 가족사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리처드 맥도날드를 만나긴 했다고 한다. 만남의 자리에서 쇼메 감독은 "이것은 자크 타티가 오랜 활동기간 동안 떨어져 있는 소피를 떠올리며 쓴 것이라 믿는다. 이런 깊은 이야기를, 같이 지내지도 않은 헬가를[각주:6] 모델로 쓰진 않았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리처드 맥도날드가 너무 격앙된 모습을 보이자 '개인사의 문제가 되었으니 어차피 이젠 작품과 상관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여 자크 타티의 유산을 관리하는 쪽을 리처드 맥도날드에게 소개시켜주고 얘기를 끝냈다고 한다. 덧붙여 맥도날드의 투고 직후 이어진 '일루셔니스트' 제작자 (Bob Last) 의 편지에는 '영화는 영화다. 작품 자체로 봐달라.' 라는 요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양쪽의 글이나 관련 반응들을 보았을 때 몇 가지는 팩트로 가정할 수 있을 것 같다:


◈ 자크 타티의 가족사 자체는 - 적어도 헤르타와 관련된 이야기는 - 사실이 맞는 듯 하다.

◈ 헤르타는 체코 시민권 소유자였으며, 헬가가 태어난 곳도 프라하. 원작의 배경 역시 프라하.

◈ 소피의 사망연도는 2001년, 즉 '벨리빌의 세쌍둥이'가 한창 제작되던 도중.

◈ 실뱅 쇼메가 처음으로 '일루셔니스트'의 원본을 읽은 것은 '벨리빌의 세쌍둥이'를 완성한 2003년.

◈ 실뱅 쇼메는 직접 소피를 만난 적이 없다. 전화통화를 했을 뿐이며, 이마저도 프로듀서인 Didier Brunner와의 통화가 주였다.


실뱅 쇼메의 말로는 처음 소피에게 연락을 한 것은 당시 자크 타티의 작품 영상을 '벨리빌의 세쌍둥이'에 삽입해도 되는지 허락을 맡기 위해서였다는데, 그의 화풍 등을 마음에 들어한 소피가 '일루셔니스트'에 어울리겠다면서 원작을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실뱅 쇼메와 헬가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다른 관계자들이 없는 것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듯 하다.[각주:7] 다만 원작의 이야기를 보면 소녀의 새 연인이 되는 젊은 남성이 마술사인 주인공의 트릭을 까발리는 장본인이고, 이후 노마술사가 석양을 향해 걸어가며 끝난다는 등, 회한 등의 어둡고 무거운, 개인적인 감정들이 훨씬 더 짙게 드러난다는 것 같다. 실뱅 쇼메는 '일루셔니스트'의 원작이 '떨어져 지내는 소피의 성장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회한과, 어느 순간 훌쩍 커버린 소피를 보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등이 반영되었다고 보는데, 개인적으로는 리처드 맥도날드가 주장한대로 헬가를 대입시키는 쪽이 훨씬 더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당사자가 소피이던 헬가이건 간에, 당위성은 어느 쪽이던 존재하지 않을까.


일루셔니스트

스토리상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뒤져보았고, 이런 뒷이야기들을 보면서 '아' 하고 해소되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도 플롯의 부족함은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나 마임극 적인 형식에서도 보이듯, 이 영화는 표현 그 자체로 대화하는 영화이다. 2D 애니메이션이 비록 하향세에 있다고는 하지만, '일루셔니스트'가 보여주는 극한의 미적 표현과, 매체-내용-형식의 통합[각주:8]에 의해 최대한으로 끌어낸 예술성은 분명 독보적인 성취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이야기의 심각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은, 그 존재 자체로 - '일루션'이라는 수식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 2D 애니메이션의 미학이 시대의 뒤안길로 사그러져 가는 도중임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표식으로 보이기도 한다.[각주:9]


아, '일루셔니스트'. 거 정말 묘한 맛이다.



p.s.

이야기의 결함이 심각하지 않다면, 철없는 여자아이의 마인드를 도무지 용납하기 힘든 필자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모습이 바로 어린 딸과 아버지의 관계라고는 하지만... 근데 여주인공은 딸이 아니잖아?


p.s.2

['업(UP)' - 짱구는 못말려 9 / 어른제국의 역습 - 일루셔니스트] 순으로 작품들을 보았는데, 뭐랄까, 비교해보면 대단하다(...).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과 그에 따른 귀결들, 혹은 자식 세대를 어떻게 포용하고 기르느냐 등을 비교하면(........).



※ 가족사나 원작 논란에 관한 링크들 (영문 사이트들입니다):

로저 에버트에게 보낸 편지와 댓글들: http://blogs.suntimes.com/ebert/pages-for-twitter/the-shame-of-jacques-tati.html

가디언 지의 기사: http://www.guardian.co.uk/world/2010/jan/31/jacques-tati-lost-film-family-illusionniste

프로듀서의 변: http://rogerebert.suntimes.com/apps/pbcs.dll/article?AID=/20100608/LETTERS/100609982

사후 인터뷰 1: http://www.scotsman.com/news/interview-sylvain-chomet-director-of-the-illusionist-1-477687

사후 인터뷰 2: http://www.electricsheepmagazine.co.uk/features/2010/08/01/the-illusionist-interview-with-sylvain-chomet/

사후 인터뷰 3: http://www.timeout.com/film/features/show-feature/10454/Sylvain_Chomet-the_trials_of_making-The_Illusionist-.html


※ 본 리뷰가 쓰다보니 망글일반 리뷰들에 비해 핀트가 심히 빗나갔으므로(...) 다른 분들 리뷰들 중 몇개:

송씨네: http://songcine.tistory.com/186

nojomi: http://extmovie.com/zbxe/?document_srl=2653191

추혜진(GISF 프로그래머): http://anidb.or.kr/_Animation/board/recommend_list.asp?seq=60

듀나: http://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401&page=1&bc=&mc=&find=&sch_date=



  1. 보다가 아무데서나 멈추고 화면을 캡쳐해도 '작품'이 나올 정도. [본문으로]
  2. 더군다나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화면에 시선이 갈 곳을 거의 한 두 군데로 제한하는 것에 반해, 이 작품에서는 동시에 여러가지 것들에 포인트를 준다! [본문으로]
  3. 원작 무대인 프라하 등을 가보니 어떻게 영상화할지 감이 안잡혔다고. 반대로 에딘버러는 처음 갔던 순간부터 그 풍광에 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런던의 가디언 지에도 편지를 보내 기사화되었으며, 이후로도 일루셔니스트를 둘러싼 대표적인 스캔달로 자리매김했다. [본문으로]
  5. 이 외에도 로저 에버트가 공개한 편지 내용에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궁금한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시길. [본문으로]
  6. 헤르타가 헬가를 낳은 것은 타티와 결별하고 프라하로 건너온 뒤라고 한다. [본문으로]
  7. David Bellos 등이 쓴 자크 타티 관련 서적들은 참고 가능할 듯 하지만... [본문으로]
  8. 2D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 일루셔니스트가 다루는 이야기 - 작품의 아트웍 등이 정말 한 몸인 듯 결합되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본문으로]
  9. 비슷한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면서도 이야기나 엔터테인먼트적 측면에서 더 뛰어난 작품들이 즐비했더라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