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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H2 - '힘내, 지지 마' 와 히까리의 마음.

by 노바_j.5 2021. 5. 30.

그 시기를 지나왔던, 문화감수성에 예민했던 아이들에게 H2라는 작품과 이 장면이 남긴 상흔은 굉장한 것 아니었을까. 대형언론의 문화부 기자가 된 소꿉친구의 카톡 프사에 불현듯 이 장면이 올라온 것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리고 지금, 새로운 생활을 앞두고 어쩌다 보니 '힘내 지지마'를 검색하고 있었다.

 

나는 H2를 대여섯번 넘게 되돌려보곤, 그 이후로도 어쩌다 한번씩 다시 보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봐도 '아, 이게 이 뜻이었구나' 하고 새롭게 깨닫는 장면들이 있더라. 

 

해석이 갈릴만한 여지가 있는 몇몇 부분들에 대해서는  ~ 특히 최후반의 ~ 그때까지도 완벽하게 '아하' 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어슴푸레한 느낌만이 남아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흘러 여러 사람들의 글들을 보니, 작은 장면들 하나하나가 다 기억나지는 않아도, 추억에 가만히 잠기며 이런저런 정리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아마도 내가 좀더 어른이 된 때문이려니.

 

휴... 담배가 땡기는구만.

 

H2 "힘내 지지마"에 대한 단상

H2 - 전반적 의미와 해석 (스포, 스압) -1 (글 말미에 2로 이어짐)

[H2] 히로-히까리 완벽 해설, 더이상 완벽한 리뷰는 없다.

 

나무위키에서의 뉘앙스도 그렇지만, 한가지 유난히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히까리가 애저녁부터 히로에 대한 마음을 접고 정리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이게 워딩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히까리가 마음도 감정도 진즉부터 없었으면 이야기 진전이 성립이 안된다. 그렇다고 그것을 '가족애나 소꿉친구로서의 마음' vs '연인으로서의 마음'으로 칼베듯 잘라서 구분하는 것은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심지어 아다치 미츠루는 옛부터 근친상간적인 사랑의 형태를 진하게 블렌딩하는 작가이다. 아다치가 그려내는 사랑의 애틋함과 비극성이 한층 더 강렬해지는 이유기도 하고.)

 

히까리에 대한 그런 설명들은, 텍스트를 조금 미숙하거나 성급하게 소화한 사람들로부터의 방어기제가 굳어진 것 아닐까 싶다. '히까리는 어장관리하는 쿠소빗치가 아니라구욧!' 이라면서 강변해주는 느낌? 마치 아이돌 가수나 배우의 비처녀 논쟁처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의 정조적 무결성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에서 한층 더 민감해보이는 이런 정조적 무결성보다, 아다치 미츠루의 H2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사람이 가진 감정의 결을 표현한다.

 

H2는 결국, 히로와 히까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이다. 성장통-어긋남이란 키워드들도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어긋남이란 요소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조금 더 '어른스러운' 연인들의 형태로 갈무리짓는다. 히로나 히까리나, 서로를 향한 마음과 그런 운명적 엇갈림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들을 눈물로 씹어삼키며, 흔히들 이야기하는 '성숙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히로와 히까리 양자 모두 '기어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일은 없다. 서로에 대한 마음의 크기와, 그럼에도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는 선택들이 대비를 이루면서 극의 드라마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고 못산다고 주변 관계를 다 뒤엎고 풍비박산이 나야만 위대한 로맨스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교해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이런 로미오와 줄리엣 엔딩으로 차마 치닫지 못하는 이유가 히데오와 하루카라는 캐릭터들이 있기 때문인데, 이 둘은 마치 배트맨에게 조커가 그랬던 것처럼 히로+히까리의 관계를 완성시켜주는 큰 존재들이긴 하지만 (이들이 어지간한 인물들였다면 진즉에 히로-히까리 엔딩으로 H2 끝!이 됐을거다), 스토리의 중심 플롯으로 보자면 결국 보완적인 존재에 그친다. 히까리가 히데오에게, 히로가 하루카에게 마음이 없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조금 더 의식적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아껴주는 관계에 가깝다. 각 커플간의 애정관계에 대해 그럴싸한 묘사들도 나오기는 하지만, 못믿으니 소통이 삐걱거리는 히데오, 믿으니까 가만히 물러나서 기다려주는 하루카는... (아무리 표면적인 입장 정리를 했더라도) 히로와 히까리 사이에 흐르는, 진하고 두텁게 쌓인 원초적인 이끌림과는 그 결이 많이 다르다. (선을 좀 넘어서 생각해보면, 히로-하루카, 히까리-히데오 커플링이 끝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마저도 히까리와 히로가 본인들이 가진 감정적 갈등에 대해서 '이러면 안된다'라는 내적반발에 힘입은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각자의 짝과 이별이라도 하면 서로에게 마음의 추가 급격하게 기울 것이 뻔하고, 그것을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라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주장을 이렇게까지 한다면 그것은 논란이 일겠지만... 가끔은 아무리 진실되고 올곧게 상대방을 동경하고 바라보더라도, 각자의 결이 가진 케미스트리가 영 맞지 않아서 헤어지는 커플들도 있는 법이기에.)

 

 

결국 이성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다는 것은, 히로든 히까리든 정조 논쟁에서는 안전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엔딩 또한 비교적 밝아보이게 그려진다. 권선징악적인 요건을 충족시켰기 때문) 하지만 동시에, 일견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에서 미친듯이 흔들리는 두 사람의 마음이 H2의 핵심 아닐까. 나는 무슨 컴퓨터에서 파일들을 지운것처럼, 케이크에서 조각을 도려낸것처럼 '마음이나 감정이 없다'가 아니라, '결심은 그렇게 하지만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힘내, 지지마' 역시, 움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처한 히까리의 울분 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야속함, 서운함, 서러움.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히로에 대한 마음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그에 얽혔던 모든 '서사'들이 깔끔하게 결자해지되는 지점이 작품의 마무리일 뿐이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의 애틋한 추억으로 정리했을지언정, 서로를 계속 위해주는 마음은 극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보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마냥 밝지만은 않은, 마음 한켠이 헛헛하고 쌉싸름한 여운이 남는 것이고.

※ 첨언하자면 일본은 어느 나라보다도 '역할에의 충실'이 강조되는 정서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친구'로서의 역할을 배신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이 비극이 더 두드러진다.

 

사랑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고, 관계에 대한 정답은 없다. H2의 커플링에 대한 부분은 특히, 비슷한 일을 겪어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느끼는 간극이 한층 더 커질 것이다. 한켠으로는 해석의 여지도 충분히 분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면으로도 대단한 작품이고... 다만, 이 작품의 엔딩이 해피냐 새드냐 물어본다면, 해피한 새드엔딩, 또는 새드한 해피엔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렇게 마음 속의 복잡미묘한 결들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외적 분출에서 내적 분출로, H2는 동양판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견할 수 있을만한 고전 명작이 아닐까. 아다치 미츠루는 만화 연출의 신이고, 이 장면, '힘내, 지지마'는, 만화 역사상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