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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2013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 The Wind Rises)

by 노바_j.5 2020. 3. 11.

"이 세상은 꿈이지..."

'붉은 돼지'가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의 '행적'을 다룬 이야기라고 한다면, "바람이 분다"는 더더욱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가진 모순과 고뇌, 꿈...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비행기랑 무기 좋아하면서 반전 부르짖는 모순에 대해서 이제 응답할 때도 되지 않았수?" 라는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의 질문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혼을 뒤흔드는 울림이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도 은퇴를 번복한 적은 있지만, 마치 순수한 유아기의 상태로 회귀하는 듯한 이 작품은 근래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이 거장의 유작으로 어울린다.

작품이 시작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떤 의미로 이상향처럼 생각한다는, 추억 속 어린 시절의 세상이 펼쳐진다. 흑백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그 시대에 대한 사무치는 동경과 그리움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다. 1923년의 관동 대지진,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 1918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세계 1차 대전... '붉은 돼지'의 엔딩 곡인 '가끔은 옛날 얘기를'에 추억으로 그리던 그 풍경이 여기에 있다.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작품이 미화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추억 속의 시절 그 자체다.) 아날로그적인 느낌과 '꿈'의 인간미를 위해서였을까? 비행기의 효과음 만큼은 전부 사람들이 입으로 내는 소리로 만들어졌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고 차분하다. 자신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피하지 않겠다는 모습이다. "그래, 격동의 시기, 나는 꿈만 보며 나아갔지." 하지만 여러 시선들에 대한 우려 때문일까, 그는 순수한 꿈이 전쟁과 결부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기에 가깝게 손을 내젓는다. 비행기라는 꿈에 대한 동경 뒤에는 어김없이 파멸의 이미지들이 따라붙고, 작품 말미(1:52:30 경) 주인공의 절친인 혼조 기로의 "우린 무기 장사꾼이 아니야. 좋은 비행기를 만들고 싶을 뿐이다."라는 대사는 사족이다. 그렇게까지 명확히 선을 긋고 싶었던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를 주인공 지로 역에 캐스팅한 것 역시도 기술적으로는 미스이지만 의미적으로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하고싶은 것만 하는 외골수 기질이 극단적인 안노는 어딘가 결여된 것 같은 지로의 느낌을 물씬 살려준다 반면 지로가 가진 인간미를 못살리는 것도 당연지사. '전쟁의 도구로 쓰인다'는 대의(大義) 같은 것은 어찌되도 좋은... 단순하게 정보로서 알고만 있을 뿐, 아예 진지하게 시선도 돌리지 않는 모습. (심지어 비행기가 가져올 수 있는 파멸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참상보다는 비행기 그 자체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이 지점을 어떻게 봐야할까... 개인적인 작품으로서는 아플 정도로 와닿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작품의 방향성이 갈피를 잡기 힘들게 만든다. 그 모순이 너무나 인간다워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언도 떠오르지만, 일반적인 잣대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 단, 내가 심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반딧불의 묘'와는 그 결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게 짚어두고 싶다.) '건담 - G의 레콘기스타'를 보면서, '이게 명작인지 묻는다면 애매할 수 있지만, 이걸 만든 토미노 요시유키는 거장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바람이 분다" 역시 같은 과다. 영상 작품은 가치판단에 종속되지만 이 작품은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선악을 넘어선 어린 시절의, 혹은 정말 인간다운 순수한 모습으로... 이것을 아예 의식하고 만들었다면 이 작품은 또 다른 결을 띄었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스로에 대한 양심과 죄책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짠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지점이다. 여하튼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그렇게 가치에 대한 평가 없이, 작품 후반 동안 시간은 그저 흐른다. 여자들의 세세한 눈짓, 탐미적으로 느린 결혼식의 시간... 부드러운 손길에 쓸리는 머릿결, 너무나도 현실적인 부부간의 스킨쉽... 이렇게 시간을 느리게 쓴 지브리 작품이 있었던가. 주인공 커플에게 주어진 시간이 없는 만큼 소중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슬로우 모션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다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간 순간을 100% 음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의미고 메세지고를 떠나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나는, 애틋하고 동심이 가득하면서도 극히 현실적인 인물들 간의 분위기 묘사가 가장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사람들은 결론을 바라고 그 결론으로 다다르는 과정을 보고싶어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그런 작품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작품 못 만들거다.)

바야흐로 2020년, 일론 머스크가 '팰컨 9'과 '팰컨 헤비'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리며 우주산업의 꿈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그 좋아하는 모습과 벅찬 광경이 지로가 비행 테스트를 성공했을 때의 모습과 닮아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시대의 바람이 순풍이 되어 불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눈으로 보지 못한, 그러나 지나가며 나뭇잎(=인간, 즉 세상)을 흔드는 바람이.

붉은 돼지 ED '가끔은 옛날 얘기를' 에 달린 댓글...

p.s. 몇가지 더빙 버전을 번갈아가며 들어보았는데 영어 버전을 들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불어나 노어 같은건 내가 알아먹지도 못하지만(...) 한미일 셋 중에서는 단연 돋보였음.


이 리뷰를 끝으로 당 블로그는 무기한 휴면에 들어갑니다.

고정적인 구독자 분들을 끌어모을 정도로 꾸준하지 못했고, 글과 사고(思考)의 깊이도 부족하였으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2004년 말부터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역 꾸역 생각의 기록을 남겨 왔습니다. 애니메이션 업에서 멀어지고 난 뒤에는, 저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계속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아직도 저의 큰 일부입니다. 행여 앞으로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만큼 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몇 시간씩 앉아서 이 블로그에 글을 적던 시간들 역시 그렇습니다.

 

소중하게 되새기며...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곳에서 좋은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NoVA_j.5 / 박재오 올림.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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