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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봇치 더 록! + 그 비스크 돌은 사랑을 한다 - 일본 애니의 새로운 완성형일까

by 노바_j.5 2022. 12. 28.

새 직장과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식사 때에는 애니 한 편을 틀어두고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포스팅에도 시간이 많이 드는지라 개별 포스팅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음엔 뭐 보지' 기분으로 가볍게 보기 시작한 '봇치 더 록!'(이하 봇치) ... 바로 12편까지 다 정주행 해버렸다.

 

봇치의 경우 소리가 가장 두드러졌다. 이렇게 쿨&클리어 경향의 사운드를 들려준 애니가 있었던가? 톤, 오디오적 감성, 녹음과 믹싱, 마스터링 차원에서의 얘기지만, 정말 깨끗하고 또렷하다. 단 주연들의 목소리나 강조하는 음역대가 비슷해서인지, 나중에는 약간 귀에 피로감이 오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으로서도 마찬가지인데, 짧고 빠른 패턴으로 반복되는 느낌이 쌓여서 뒤쪽으로 갈수록 조금은 피로감이 느껴진다. 뒤늦게야 원작이 4컷 만화 베이스였다는 것을 깨닫곤 '아아 그래서...' 싶었다.

 

최근에 비스크돌 1기를 보고서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곧바로 봇치에게서도 그 기시감이 느껴진다. 예전엔 단순히 작화 퀄리티가 곧 그 애니의 퀄리티였는데, 작화 분야에 그치지 않는, 제작의 전(全) 분야에서 애정과 영혼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작년의 코미양에서부터 느껴지는 흐름인 듯 같기도 하고. 짧게는 요 몇년... 길게는 90년대 이후 약 20년 동안의 과도기를 거쳐 일본 애니가 어느 정도 새로운 완성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셀 시대 거장들의 커리어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요즘, 온전히 세대의 바톤 터치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미술, 작화, 비주얼

일단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비주얼이다. 디지털 작화와 3D 도입 이후에 요즘처럼 디지털 기술이 자연스럽게 활용되고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이제는 디지털 작화와 페인팅은 물론이거니와, 3D와 실사 사진, 영상까지도 필요한 부분에만 적재적소로 사용하고, 툰 셰이딩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실사 영상을 트레이싱을 하는 로토스코핑 기법마저도 3D 애니메이션을 트레이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비스크돌에서는 압도적인 마린의 움직임 묘사와 더불어 상당히 감탄하면서 봤다. 봇치의 경우엔 다양한 애니메이팅 기법을 선보이며 포맷의 벽을 넘나드는 모습이 대단했고... 이런 모든 것들이 한 작품에 녹아 어우러지는데 이질감이나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고, 그림이 온전히 하나로 느껴진다. '불쾌한 골짜기'를 극복하고 '대유쾌 마운틴'에 올라갔다고나 할까.

 

작품의 소스, 원천

버블붕괴 이후 일본 애니는 오타쿠 위주, 원작이 있는 작품 위주의 '안전빵' 노선으로 변경하며 지금까지 상당히 길을 헤매는 인상이었다. 오리지널 작품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고, 한 동안은 만화부터 라노벨까지 대박 원작을 바탕으로 '얼마나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했을까?'가 작품의 평가에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코미양 때엔 뚜렷이 인지하지 못했는데, 비스크돌의 경우에는 시청하면서도 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다. '이거... 원작보다 잘 만들었겠는데...?'

 

이 부분은 각자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원작들을 둘러본 내 개인적인 견해로 코미 양의 경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고, 비스크돌과 봇치의 경우는 애니 쪽의 압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스크돌의 경우 원작을 보지 않았는데도 원작초월이구나 싶었던 이유는, 스크린 샷을 아무리 잘 찍어도 그 매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움직이는 그림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매력'의 지분이 굉장히 컸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은 정해진 화면 비율 속에, 시간에 지배되는 매체다. 구도, 타이밍, 그리고 소리 등등... 코미양-비스크돌-봇치 로 이어지는 작품들을 보면, 이런 '영상물로서의' 연출과 디렉팅 자체가 혀를 내두를 만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너무나 온전한 영상물로서 완성되어 있고, 만화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2002년의 '아즈망가 대왕' 등을 떠올려 보라.)

 

근 1년 사이 최고의 라인업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모습은, 이미 대박이 났다기 보다는 '가능성'이나 '잠재력'이 큰 원작의 매력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포맷에 맞추어 완전히 재탄생시키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 비교적 초기에 판별을 하기 때문에 연재 속도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그렇다고 기존 유명작가의 작품인 것도 아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원나블' 등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른데, 이들의 경우엔 아예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활로를 찾았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제대로 된 인력이 투입되었을 경우, 신인 작가들보다 애니 제작진 쪽이 완성도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디어는 신선하고 톡톡 튀지만, 표현이나 기술 면에서는 미흡할 신인 원작 작가에 비해 숙련된 인원들이 여럿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만화 내에서 보면 원펀맨 역시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각색이라... 이 쪽은 아직 모로사와+후쿠다의 건담 시드 단계인가 싶다.

이것이 MZ인가

성우들도 처음 보는 성우들인데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 연기의 결이 기존의 정형화된 애니 성우의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하면서도 유연하고... 말그대로 신선한 느낌이다. '생활밀착형' 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아마도 개개인의 순수 능력차라기 보다는, 지금 세대에 더 맞는 옷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몸에 배인 습관도 없고, 동시대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담이지만 요새 '택틱스 오우거: 리본'을 플레이 중인데, 4자매 중 막내로 나오는 시마모토 스미 성우의 목소리에서 확 올드함이 느껴지는게 참... ㅜㅠ)

 

하지만 일본 애니라는 포맷 자체에 새로운 세대의 도래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애니메이션들이 초점을 맞추는 인물상과, 그들을 보듬는 방식에 있다.

 

90년대까지의 작품들은 무엇에든 진지했으며, 대체적으로 꿈과 열정이 가득했다. 그 전 세대부터 이어진 낭만, 교훈적인 면도 어느 정도 잘 간직하고 있었고. 그러나 95년 중반부터는 기존 관념을 비틀거나 파괴하는 '멋지다 마사루' 같은 작품들이 출현하고, 에반게리온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혼자만의 세계에 파묻히지 말고 현실 세계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새롭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신시대의 작품들에서는 그런 교조적인 태도를 찾을 수 없다. 이제 와서 그러기엔 너무 늦기도 했고. 내성적이고 음적인(陰キャ) ~ 소위 '아싸'로 통하는 ~ 주인공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보듬어주는, 따듯한 혹은 평등한 시선이 주를 이룬다. 이 지점이 흥미로운데, 근래에 일본애니 업계가 주 타겟으로 삼아왔던 '오타쿠' 층과, 기성세대가 비판하는 소위 '무기력한 MZ세대'의 경계가 어느 순간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쪽의 감성, 특히나 자조적인 유머코드는 오덕들의 오랜 관습(?)이기도 하고, 현대의 인터넷 세대에서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격하게 공감하고 웃을 수 있었다. 자칫 끝없는 자기비하와 무차별적인 분노/혐오 표출로 이어질 수도 있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마주보고 공감해주는 것은 시청자로 하여금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호흡하고 있다는 강렬한 실감을 부여해 준다. 어느 정도의 위안도 있기는 하지만, 어엿한 제3자의 "정신 차려" 라던가 "괜찮아" 라기 보다는 그냥 일상과 세상의 일부로 함께 살아가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다시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를 밝게 비춰준다. 열혈이 쓸데없는 진지함으로 변했듯, 각종 차별에 대한 시선과 생각들이 바뀌듯, '무기력한 아싸'들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지금 우리에게 불고 있는 시대의 바람이리라.

지금의 30~40대가 어릴 때 즐기던 것들이 아직도 주류인 이유가, 그게 최고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래 세대들은 인구수와 자금력 면에서 돈이 안되기에, 돈이 되는 윗세대를 중심으로 계속 가는 거라는 글을 인상깊게 보았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지금의 어린 세대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조차 없어서 어떡하느냐며... 나 역시 몇몇 커뮤니티에서 주류층인 유저들이 왜 이렇게 날이 서 있는지 (특히 롤같은 경우는 책임소재도 불분명하니...;), 그리고 '마이클조던 < 코비/르브론', '호나우도 < 메시/호날두'처럼 자신들과 동세대의 우상이 최고임을 강변하기 위해 왜 이렇게 공격적인지 따위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 입장에서는 "우리한테 이제 이것마저 앗아가려 하는거냐"는 심정 아닐까...?'

 

오리지널 작품들이 줄어들고 안전 노선으로 접어든 뒤, 신진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게도 비난이 쏟아졌다. "(전쟁이나, 격렬한 학생운동 등을 겪은 이전 세대에 비해) 겪어본 것은 없고 애니만 보고 자랐으니 자기복제만 하고 알맹이가 텅 비었다!" 라며.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세대에는 자기만이 겪을 수 있는 고초가 있고 희노애락이 있다. (이것은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 내가 일련의 최신 애니들을 보고서 무릎을 탁 친 것은, 근 20년간의 방황 동안 일본 애니가 감내해야 했던, 그리고 지금의 'MZ세대'가 견디고 있는 원론적인 비난들에 대해, 온전히 자신들의 경험과 힘으로 '이것 봐라!'는 듯 시원한 대답을 내놓은 것 아닐까 하는, 통쾌함 비슷한 그 무엇 때문일 거다.

 

 

p.s.

요근래의 대형 히트작들은 신인 만화 단독으로서는 오르지 못했을 수준으로 작품을 승화시키는 경향.

어찌 보면, 이제 주류 일본애니는 기타 서브컬쳐에 하나로 융합+진화하는, 공동브랜드화 하는 것일지도?

이건 곡 하나에도 10명 넘게 작곡가가 달라붙는 대중음악계 역시 비슷한 흐름.

신세대적 기질은 그런 면에서 '내 것'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콜라보/협업에 훨씬 열려있다고도 할 수 있음.

 

 

3줄 요약:

- 전 분야에서 결과 기술이 완전히 다르면서도, 온전하게 완성된 형태를 갖춤

- 작품의 원천, 그리고 빌드업에서의 과정과 목표가 이전과는 차별화됨

- 스토리텔러로서 새로운 시각과 스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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